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들: 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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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3-02 | 조회수7,112 | 추천수0 | |
[성경 속의 여인들] 사라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였습니다(창세 11,29-30). 성경 속 사라는 한 남자의 아내에서 한 아이의 어머니로 25년간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2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이였던 이름은 사라로 바뀌었고, 25년의 세월에 사라는 어머니가 되는 길의 고단함을 온전히 겪어내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남편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여긴 건 대개의 여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었고 사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창세 12,10-13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은 비겁했습니다. 제 일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라는 묵묵히 아브라함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아내라는 자리가 그런 것인양, 아내는 지아비의 뜻이 무엇이든 따르고 받들어야 하는 것인양 말입니다.
창세기는 사라의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번엔 아브라함을 위해 후손을 챙기는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가르를 아브라함에게 안깁니다. 아내이기 위해, 어머니가 되기 위해, 사라는 지독한 무리수를 두는 것이지요. 사실 구약에서 ‘아들’은 하느님 약속의 상징이었습니다(창세 15,2). 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합니다. “여보, 주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갖지 못하게 하시니, 내 여종과 한자리에 드셔요.”(창세 16,2) 사라는 하느님을 믿으나, 하느님의 약속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는 매우 둔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주시리라 약속하신 것에 사라는 웃음으로 무시하기도 했으니까요(창세 18,12-13). 사라는 아들이란 존재를 하느님 약속의 표징이 아니라 자신을 추켜 세우기 위한 도구로까지 여깁니다. 창세 16,2에는 이렇게 전합니다. “행여 그 아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내가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자면 조금 다른 의미가 전해집니다. “그 여종을 통해 아마도 제가 세워질지 모르잖아요.” 사라에게 아들은 어머니로서 거듭나고자 하는 제 갈망이 투사된 도구가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뜻을 따릅니다. 그러나, 하가르의 배가 부를수록 사라는 제 삶을 불안해 합니다. 하가르가 아이를 아브라함에게 안긴 후에는 제 존재의 가치를 세우기는 커녕 질투와 분노로 제 모습을 잃어가는 사라를 목격하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라는 이사악을 얻고도 하가르와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창세 21,8-10에는 하가르의 아들 이스마엘이 웃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라를 소개합니다(우리말 성경은 이스마엘이 ‘놀다’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웃다’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웃고 즐기는 이는 사라의 아들 이사악이어야만 했지요. 웃음은, 그 행복은 사라 자신의 것만이어야 했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몸종 하가르와 그 몸에서 나온 이스마엘을 쫓아내고야 맙니다. 그것이 성경이 전하는 사라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런 사라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사라를 통해 우리의 ‘모성애’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슬프고 애달픈 모성애와 닮았습니다. 어머니는 희생하고 무너지고, 때론 지독스레 배타적이고 무모할지라도 가족이 괜찮으면 모든 게 괜찮다는 것이 우리의 ‘모성애’가 아닐까요. 그것이 과연 모성‘애’라고, ‘사랑’이라는 말마디와 어울리기는 할까요, 한 여인의 삶이 다른 이를 위한 불쏘시개로 지펴진 슬픈 이야기가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우리는 사라를 통해 한 가지 묻게 됩니다. 제 삶을 완전하게 하려는 것이 행여 지금의 제 본디 모습을 잃어가는 건 물론이고 하느님의 뜻마저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어르신들이 자주 말씀하셨죠. ‘순리대로 살아라’. 신앙인은 ‘순리’를 하느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라를 통한 하느님의 섭리는 제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제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경험하고 난 후에야 후회와 반성을 하는 일은 대개 지금의 삶이 아닌 ‘내일의 삶’에 대한 무모한 갈망과 집착의 결과로 드러나는 건 아닌지, 사라를 통해 묵상해 봅니다.
[2021년 2월 28일 사순 제2주일 대구주보 3면,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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