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유다에 관한 질문입니다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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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4-06-02 | 조회수1,190 | 추천수1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자료를 검색해 보니 제가 2011년에 썼던 자료가 있어서 옮겨 왔습니다.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마태 27장의 유다가 자살하다
1) 일찍이 예루살렘 교우들 사이에 유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생겨났고, 이것이 구전되던 중에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 중 한 갈래가 27,3-10에 채록되고, 또 한 갈래는 사도 1,18-20에 채록되었으니 다음과 같다: "유다는 불의한 삯으로 토지를 샀으나, 앞으로 거꾸러져서 배가 터지고 그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그 토지를 그들 지방말로 하켈 다마하라 했으니 피의 토지라는 뜻입니다. ..."
2)유다의 죽음 이야기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밝히기란 매우 어렵다.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능하다.예루살렘의 힌눔 계곡 남쪽에는 옹기장이들의 마을과 밭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밭이 나그네들의 묘지로 변했다. 이 묘지는 아람어로 하켈다마(잠드는 자리)인데, 그 발음이 살짝 변하여 사도1,19에서처럼 하켈 다마하(피의 자리 = 피의 토지.피의 밭)라고도 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배신자 유다의 죽음과 하켈 다마하를 결부시켜 전설을 만들었다. 즉, 유다가 버린 예수님 몸값으로 고급제관들이 밭을 사서 하켈 다마하라고 불렀으니, 곧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때문이라고 하는 전설을 만들었다(마태오 전승). 또 다른 전승 한 가지가 사도행전에 채록되어 있다. 유다 자신이 예수님 몸값으로 밭을 샀으나, 그만 그 밭에서 "앞으로 거꾸러져 배가 터지고 그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왔기에" 주민들이 그 밭을 하켈 다마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즉, 유다의 피가 쏟아진 밭이기에 그렇게 불렀다는 전설이다. (사도행전 전승)
3)유다는 스승을 배신한 다음 그리스도인들의 눈앞에서 아주 잠적해 버렸던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의 여생이나 말로에 관해 아무런 소식도 못 들은 것 같다. 그러니 전설을 만들 수밖에. 어떻게? 악인들의 끝장은 으레 비참한 법, 따라서 배반자 유다의 말로는 매우 비참했다는 전설을 꾸몄을 것이다. 유다의 말로에 관한 제3의 전설이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60~130년경) 단편 3항에 전해오는데 직역하면 이렇다:
"유다는 불경의 큰 본보기로서 이 세상에서 처신했다. 그는 몸이 엄청나게 부어올라, 마차가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곳도 통과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그의 머리통조차도 통과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눈꺼풀이 엄청나게 부풀어서 전혀 빛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의사가 검안경(檢眼鏡)을 사용해도 그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눈이 눈언저리에서 그처럼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음부는 어떤 흉물보다도 흉하고 크게 보였다. 수치스럽게도 온 몸에서 고름과 구더기들이 음부로 흘러나왔으니, 이는 필연적 현상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많은 고통과 죄벌을 겪은 다음 제 토지에서 죽었는데, 그 토지는 냄새가 나서 이제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땅이 되었다. 아니, 손으로 코를 막지 않고서는 오늘날까지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갈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의 몸에서 그처럼 많은 분비물이 땅으로 흘러내렸던 것이다."
사도1,18-20절은 루카가 유다의 말로에 관한 전승을 모아 수록한 것이다. 이 전승의 변체가 마태 27,3-10에 그리고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가 120~130년경에 집필한 [주님의 말씀] 중 후세에 전해진 단편 3장에 있다.
마태 27,3-10: "예수를 넘겨주었던 유다는 그분이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자, 뉘우치고 은전 서른 닢을 대제관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넘겨주어 죄를 지었소"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오? 당신이 알아서 하구려"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성소 쪽으로 은전을 내던지고 떠났다. 그렇게 물러가서 목을 매달았다. 대제관들은 은전을 거두면서 "이것은 피의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됩니다"했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것으로 나그네들의 묘지로 쓰려고 옹기장이의 밭을 샀다.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도 "피의 밭"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예레미아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받았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값매긴 자의 몸값이로다. 그들은 그것을 주고 옹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주님이 나에게 명하신 대로 된 일이로다.'"(즈카11,12-13; 예레32,6-9)
유다의 말로에 관한 세 가지 전설(마태27,3-10; 사도1,18-20; 파피아스 [주님의 말씀] 단편 3장)을 비교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더 비참하게 서술된다. 객관적 정보는 매우 빈약했던 모양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의 말로는 비참하다는 통념에 따라 유다의 죽음에 관한 전설을 꾸몄을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을 몹시 박해하다가 기원전 164년에 비명 횡사한 안티오쿠슨 4세의 최후(2마카9,5-29),무려 33년 동안 폭정을 일삼다가 기원전 4년 예리코에서 병사한 헤로데 대왕의 최후 (유다고사 17,169), 대왕의 손자로서 요한 사도와 형제인 야고보 사도를 참수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나서(사도12,1-19) 얼마 안 되어 44년 4월 병사한 아그리빠 1세의 최후도 비참했으리라고 여긴 그리스도인들이 저 비극적 전설들을 만들어냈으리라. 세월이 흐르면서 전설은 전설을 낳아 유다의 최후는 더욱 비참해지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의 최후에 관한 이 전설을 그곳 시민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장소와 연관시켰을 것이다. "나그네들의 묘지로 쓰인 옹기장이의 밭"(마태27,7), 그리고 "피 밭"(마태27,8), "아람어로 하켈다마흐, 번역하면 피의 토지"(사도1,19) 등이 바로 그 장소들이다.
옹기장이 밭과 피 토지는 같은 곳인데, 아마도 힌눔 계곡이 끝나는 지점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은 전설의 전승 또는 편집 과정에 구약성서에서 알맞은 구절을 찿아내어 유다의 비극적 최후가 마치 예언의 성취인 것처럼 서술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마태 27,3-10에 따르면 유다가 목을 매어 자살한 다음에 제관들이 예수의 몸값으로 피 밭을 샀다. 이와는 달리 사도 1,18에서는 유다가 스스로 토지를 사고 나서 뜻밖의 사고로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루카는 아람어 하켈다마흐,아람어 원문에 가까운 발음으로는 하켈 드마를 그리스계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해서 그리스어로 "피 토지"라고 번역해 놓았다.왜 그런 이름이 생겼나? 유다가 "거꾸로 떨어져서 배가 터지고 그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왔다:(사도1,18)는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루카는 말한다. 이와는 달리 마태오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겨 피를 흘리게 한 까닭에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마태27,4.6-7). 밭을 사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루카와 마태오의 기록은 다르다.
루카는 유다 자신이 예수를 판 돈으로 자신의 토지를 산 것으로 기록하나, 마태오는 유다가 예수를 판 것에 대해 후회하고 대제관들과 원로들에게 도로 가져온 돈을 데제관들이 성전 금고에 넣지 않고 옹기장이의 밭을 산 것으로 기술한다
(마태27,1-10).
이상은 200주년 신약성서 마태27장과 사도1장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인간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서 태어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그 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이미 정해진 틀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부모가 자식의 운명을 축복하지 않겠는가를.
이 문제는 앞에서 충분한 답변을 주셔서 저는 다른 쪽으로 접급하려고 합니다.
유다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의 문제들을 지금의 내 삶과 연결하여 묵상하는데 의미를 두어야지 그 인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성경의 인물들이 살아온 모든 삶의 내용들은 지금 현재를 사는 내 모습을 먼저 살아간 삶의 모델들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하느님을 어떻게 잘 흠숭하고 살았는지를 배우고 또한 유다처럼 어떻게 하느님을 배신 했는지도 배우며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방식과 같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그 깊으신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동안 배우셔서 아시겠지만
제자들이 생각했던 이스라엘의 해방과 구원의 방식과 예수님의 방식은 아주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왕(메시아)은 이 세상의 왕을 보기 좋게 무찔러 자신들의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그런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 사건은 그것을 해 주실 능력자로 제자들에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신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생각해 낸 좋은 방법이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지요. 그래야 대대적인 싸움이 시작될 것 아닙니까? 유다는 이스라엘의 해방이 싸워서 얻어지는 나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처럼 죽는 방식이 아니라 싸워서 이기는 삶의 방식을 취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의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가는가를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만 예수님을 팔아먹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도 이와 같은 이유로 또는 여러가지 이유로 예수님의 뜻을 거부하며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수 없이 예수님을 팔아먹고 있는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고 미리 공개하십니다.
유다에게만 "나는 네가 나를 배반할 것을 안다. 생각을 바꿔라!"하실 수도 있는데 왜 공개하셨을까요?
제자들이 함께 풀어나가길 기대하셨고 유다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신 것은 아닐까요?
왜 유다에게 돈 주머니를 맡기셨겠습니까?
그만큼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스승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왜 스승님의 기대에 못미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는 스승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잘나서 맡기셨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유다처럼 예수님께서 교회에서 봉사하라고 맡기신 일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가 잘나서 교회에 그러한 일을 맡기셨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니다.
유다는 스승님의 깊은 뜻보다 당장 손에 "돈"을 쥐고 있다보니 보이는 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어떤 때는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해결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할 때 무엇으로 유혹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루카22,3 참조)라고 하고 요한복음은 악마가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요한 13,2 참조) 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탄도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 나를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유다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자신이 생각한 방식대로 살려고 하다보니 그 생각이 사탄과 코드가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노예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잠자고 있으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사탄이 불어 넣어준 생각인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인지 분별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을 가는 존재가 아니라 악으로 기우는 존재이기에 늘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요한 복음의 증언을 자세히 묵상해보면 유다의 배신이 유다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유다가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베드로와 요한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회의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 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요한 13,22-26)
왜 예수님을 팔아넘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는데 가만히 있었을까요?
이 모습은 지금의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형제중에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형제가 있어도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만 아니면 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성경은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지금 나에게는 유다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어지고 있는지를 잘 살펴 유다와 같은 불행한 삶을 살아가지 말것을 권고하고 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다가 구원을 받았을까? 아니면 받지 못했을까?
우리들의 관심은 그것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다가 구원되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도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느님 안에서 형제가 용서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는 것을 원하실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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