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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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3-16 | 조회수8,090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다 (1)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유다입니다.
성경에는 구약에 두 명, 신약에 두 명, 총 네 명의 유다가 등장하는데, 지금부터 살펴볼 유다는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로서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네 번째 아들입니다. 다른 세 명의 유다는 마카베오 항쟁의 영웅 유다 마카베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 타대오라고도 불리는 예수님의 제자 유다입니다. 히브리어로 유다의 이름은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탄생 이후 유다가 처음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때는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유다는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지 말고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리자는 제안을 합니다 (창세 37,26-27).
그런데 창세기 37,21-22에는 요셉을 살리려 노력하는 인물이 르우벤으로 나옵니다(창세 37,21-22). 이 차이는 엘로히스트와 야휘스트라는 두 개의 다른 전승이 한 데 섞였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즉, 기원전 930년 이스라엘이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된 뒤, 북 왕국에서 생겨난 엘로히스트 전승은 그에 속한 지파 가운데 맏이인 르우벤을, 남 왕국에서 생겨난 야휘스트 전승은 자신들의 조상인 유다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쨌든, 이 사실만으로 유다를 의인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유다는 요셉을 온전히 지켜 주지 않습니다. 요셉이 어쩌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통을 겪을지도 모르는 이방인 노예 생활을 하게 만들죠. 아마도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히는 끔찍한 죄는 짓고 싶지 않았지만, 요셉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른 형제들과 같았을 겁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크게 비통해하며 삶의 의욕까지 잃어버린 아버지에게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죠.
그런데 결국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기고 돌아온 유다의 마음은 편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상심한 아버지 야곱을 볼 때마다 죄책감도 들었겠지요. 그래서인지 유다는 가문이 터 잡은 헤브론을 떠나 아둘람으로 갑니다.
창세기 38,1은 유다가 헤브론에서 아둘람으로 내려갔다고 하는데, 사실 아둘람은 헤브론의 북쪽에 있습니다. 물론 아둘람이 헤브론보다 지대가 낮은 곳에 있기에 내려간다는 말도 맞습니다만, 여기서 내려간다는 말은 불길함을 암시하는 동사로 해석합니다. 유다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을 예고한다는 말이죠. [2021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다 (2)
유다는 아둘람에서 이방인과 결혼을 합니다.
창세기 38,2에는 그의 아내가 가나안 사람이었다고 나오는데, 이 표현은 가나안 땅의 토착민을 의미할 수도 있고, 상인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아내 수아의 이름은 부유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조상 유다가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과 혼인했다고 보지 않고 동족 가운데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했다고 해석합니다. 유다와 수아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나는데, 에르, 오난, 셀라입니다.
그런데 타마르를 며느리로 맞이하면서 누구보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원했을 유다의 바람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타마르가 불행을 몰고 온 것이 아니라, 타마르로 인해 유다 가정의 실체가 드러난다고 보아야겠습니다. 사실 타마르는 가해자가 아니라, 매우 불행한 운명을 겪은 피해자입니다. 당시의 관습대로 타마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다의 맏아들 에르에게 시집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르는 악했습니다(창세기 38,7). 그의 악행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찌나 악했으면 그 이름조차도 악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아’를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남자의 아내가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결국 에르는 자신의 악함 때문에 하느님의 분노를 사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맙니다.
그러자 유다는 타마르를 둘째 아들 오난과 재혼시킵니다. 이것이 매우 해괴망측하게 보이겠지만, 신명기 25장은 수혼법(嫂婚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낳은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신명 25,5-6) [2021년 3월 21일 사순 제5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다 (3)
이스라엘의 수혼법과 비슷한 제도가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아메리카 대륙, 고구려에서도 발견되는데, 형제가 없는 경우는 가까운 친척이 이 의무를 이행하기도 했습니다. 수혼법의 목적은 두 가지인데, 먼저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 의해, 결혼 후에는 남편에 의해 부양되던 여인이 남편이 죽고 나면 아들에 의해 부양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문의 재산이 밖으로 유출되는 일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들이 없이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그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마르는 빈손으로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오미와 룻은 밀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해야 할 만큼 가난했던 것입니다. 수혼 제도를 통해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은 죽은 남편의 아들로 인정되어 그의 땅과 재산을 물려받아 그것으로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타마르를 오난과 재혼시킬 때도 유다는 마치 그의 의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재혼 또한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오난 또한 형처럼 악했기 때문입니다. 오난은 형의 재산(유산을 분배할 때 아버지의 재산을 아들 수에 1을 더한 수로 나눠 장자에게는 두 몫을,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한 몫씩을 주었습니다. 유다의 경우는 장자에게 돌아갈 몫이 전 재산의 절반입니다)을 차지하려고 타마르가 아들을 잉태하는 것을 가로막고 그를 쾌락의 도구로만 삼는 죄를 저질렀기에 천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타마르와 결혼한 두 아들이 모두 죽자 유다는 자기 아들들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타마르를 마치 죽음의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여겨 막내아들인 셀라마저 잃을까 두려워 그를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그래서 타마르는 생과부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타마르는 친정집에서 죽은 사람처럼 지내며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막내아들 셀라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와 짝지어주지 않자 위험한 일을 계획합니다. 유다가 유목민의 가장 크고 기쁜 축제인 양털 깎는 축제를 지내러 간다는 말을 듣고 그를 통해 아들을 낳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이 일은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애초에 타마르의 목적은 유다를 만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2021년 3월 2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다 (4)
레위 18,15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간음으로 여겨졌는데, 간음죄의 심각성은 타마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유다가 그를 화형에 처하려고 한데서도 드러납니다(38, 24). 사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주는 화형으로 처벌하려고 한 것은 과한 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간음죄를 저지른 이는 투석형에 처해졌고, 제사장의 딸이 간음했을 경우만 화형에 처했기 때문입니다(레위 21,9). 여기서 유다는 율법이 정한 간음죄의 처벌을 넘어서 명예 살인(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인을 처형하는 행위로서 오늘날에도 일부 문화권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을 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는 타마르를 일반적인 창녀(조나)가 아니라 신전 창녀(케데샤)로 오해했던 것 같다. 가나안에서 신전 창녀와의 교합은 다산과 풍작을 비는 제의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있어 타마르와의 만남은 축제의 분위기에 휩쓸려 우연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애초에 창녀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음이 화대로 지급할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서 드러납니다. 타마르의 이름은 종려나무라는 뜻인데, 그 이름대로 타마르가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서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려나무는 단단하고 생명력이 강하기도 합니다. 타마르는 자기 탓 없이 비참한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나약한 여인이 아닙니다.
타마르는 담보물(당시 신분증의 역할을 하던 원통형 인장, 인장을 목에 거는 가죽 줄, 가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유한 조각이 새겨진 지팡이)이 아니고서는 증언의 효력조차도 갖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지만,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입니다. 과부가 아님에도 강제로 입혀진 과부의 의복을 과감히 벗어 던졌습니다. 이 의복은 남편을 둘이나 죽이고도 아들을 얻지 못한 저주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사실 책임은 타마르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타마르가 과부의 옷을 입는 것은 부당합니다. [2021년 4월 11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유다 (5)
타마르는 유다가 변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유다는 형제들이 야곱에게 요셉의 죽음의 증거인 의복을 확인하라고 할 때, 유일하게 침묵한 인물입니다. 타마르는 유다에게 자신이 준 징표인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이제 유다는 계속 침묵할 것인지 아니면 진실을 말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타마르가 유다에게 올바른 선택을 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타마르를 만나기 전과 후의 유다는 분명 변한 모습을 보입니다.
타마르가 유다를 만난 곳은 에나임입니다. 이 이름은 쌍둥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실제로 타마르는 페레츠와 제라 쌍둥이를 낳는다), ‘눈을 뜨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이름대로 타마르 덕분에 유다는 눈을 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38,26에서 유다는 타마르가 자신보다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이야기꾼의 관점에서 기록된 창세기와 달리 죽음을 앞두고 유다 자신의 입으로 이 사건을 회상하는 ‘유다의 유언’이라는 외경이 있는데요, 여기에서 유다는 사탄이 자신의 눈을 가렸기에 죄를 짓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이전 유다의 행위는 불의합니다. 자식들의 악은 보지 못하고, 모든 책임을 며느리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들들의 악은 아버지 유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또한, 막내아들 셀라가 남아있기에 타마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과부가 아닌데도 과부처럼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설사 수혼법에 따라 결혼할 대상이 없는 과부라 하더라도 친정에 돌아가는 것을 결정할 권리는 시아버지가 아니라 과부 본인에게 있었는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처녀나 아들을 낳은 과부와 달리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큰 수치를 당해야 했으며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지위에 있었는지 모를 리 없었음에도 말이죠.
그랬던 유다가 이제는 타마르에게 속아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끄러운 죄를 짓게 되었음에도, 그 사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이전에 그를 대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타마르의 손에 더는 그의 명예를 위협할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유다 전승을 모아놓은 토세프타는 이 일을 높이 평가하며, 이 때문에 맏이가 아니라 넷째 아들인 유다의 가문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고(49,10)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어 유다는 앞으로 그가 보여줄 모습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게 됩니다. [2021년 4월 18일 부활 제3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계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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