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서공석 요한(서강대학교 교수 · 신부)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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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4-06-22 | 조회수2,024 | 추천수0 |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서함 16호]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 통공이란?
서공석 요한(서강대학교 교수 · 신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말하는지요? 구원의 대상은 가톨릭이 전래되지 않았을 때의 사람들 중에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나, 비신자이면서 타종교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타종교 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인지요? 또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구원된다는 것인지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K. Rahner)가 1960년 사용하기 시작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비그리스도인에게도 은총을 주시고 그들의 구원을 원하시기에(1디모 2,4 참조) 그들도 그리스도적 진리를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격언이 그 입장을 요약합니다. 이 격언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부터입니다. 교회는 4세기에 로마 제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고 제국의 국교가 됩니다. 5세기부터 야만인이라 불리는 게르만족이 유럽으로 이동해 와서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신앙을 동일 이념으로 하는 중세 정치, 문화 사회가 출현합니다. 이 사회 안에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격언이 사용되는데,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란 자기 탓으로 신앙을 버리고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실 중세 사회에서 “교회 밖에” 있다는 것은 현세와 내세를 위해 공민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5세기말 미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은 인도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고유한 문화를 발견하지만, 식민주의적 사고 방식과 유럽 문화에 대한 우월감은 아시아 문화와 종교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조상 제사를 금지한 로마 교회의 결정은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만, 유럽 교회가 빠져있던 식민주의적 패권주의가 빚은 하나의 결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선교와 식민주의는 구별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각 문화권의 고유한 문화적 종교적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가 식민주의적 사고 방식을 버리면서부터 된 일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회 사상 처음으로 다양한 문화 안에 뿌리내린 세계 교회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1962~1965년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사상 처음으로 5대양 6대주에서 주교들이 참석한 명실상부한 세계 공의회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계 교회로서 의식을 갖게 되면서 타종교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습니다. 타종교 전통에도 하느님의 일하심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타종교 전통들 안에 그리스도교가 인정할 수 있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신앙인들에 대한 교회의 공식 엽장을 바꾸었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그리스도인들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16항).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에서 공의회는 “그들의 민족적 및 종교적 전통과 친숙하여져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말씀의 씨를 기쁨과 경의를 가져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11항)고 선언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시작하는 성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로마 6,3)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 됨은 일순간에 기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식에서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살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한 것을 시간 안에 실현하면서 부부라는 실재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됨도 신앙인이 일생 동안 살아야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농도 짙게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함께 계심’에 충실하셨기에 율법과 유다 종교 제도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 시대 기득권자들의 미움을 받고 단죄되어 죽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에 충실하신 나머지 그 시대 기득권자들이 중시하는 율법과 제도에 충실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에는 기존의 질서를 무시하는 범법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충실히 사는 길은 예수님의 설교와 생활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들은 아버지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고 예수님은 확신하고 그 정신에 따라 사셨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되찾아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루가 15,11-31)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8,1-11)을 돌로 치려는 유다인들로부터 구해 내는 예수님의 모습 등에서 하느님이 어떤 자비와 어떤 사랑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안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의 말씀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 아직도 많지만 여러분이 지금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요한 16,12-13 참조). 예수가 역사의 모든 상황에 필요한 우리의 자세를 다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붑니다”(요한 3,8 참조).
우리는 성령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감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일하심은 교회 밖에도 있는 것이고 교회 밖에서도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살기 위해 십자가를 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구원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만 그리스도인도 어떻게 구원되는지를 우리는 사실 모르지 않습니까? 구원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시편 118,23 참조)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사도 신경에 “……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지서 말하는 ‘통공’이란 무슨 뜻인지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 신경은 한 번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발전하여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만 있었지만 후에 성령이 일하시는 교회에 대한 고백이 첨가되고 4세기말에 와서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성인의 통공”과 “죄의 용서”가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인의 통공”은 성령이 발생시킨 교회 현상의 한 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신비를 반영하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의 상호 관계를 더 강조하여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인의 통공”은 현세와 내세의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의 거대한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이 소개하는 예수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저 또한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 또한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7,21.23 참조).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인이라고 하면 로마 교황청에서 성인으로 공표한 사람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신경에 나오는 이 “성인들”이라는 말은 모든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구약성서에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거룩한 백성이라 부른 것은 모세와의 계약에서 하느님이 “나 너와 함께 있다.”(출애 3,12)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택하셨고 함께 계심을 약속하셨기에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선택된 백성”,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시대 유다교 지도자들은 병든 사람, 마귀 들린 사람(정신병 혹은 간질병을 말하는 그 시대 표현)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버린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병 고침과 마귀 쫓음의 기적을 행하시면서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함께 계심으로 거룩한 백성이었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사는 것이기에 거룩한 사람, 곧 성인 혹은 성도(사도 9,23; 1고린 15,33; 2고린 1,1)라고 스스로 부르게 됩니다.
“통공”이라는 말은 ‘하나 됨’, ‘친교’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은 성체성사를 통해서입니다. “주는 몸”, “쏟는 피”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성사적으로 이룹니다. 성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실제 삶에서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 우리 이웃을 위해 우리 스스로를 주면서 성찬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하나 됨, 형제들과 하나 됨이라는 “통공”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회의 여느 단체와 같이 권력 구조가 아닙니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3,14-15 참조)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은 높고 강하고 군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하고 베푸시는 분입니다.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의 봉사와 베푸심을 실천해야 하고 이 실천에서 우리는 우리의 “통공” 곧 하나됨을 사는 것입니다.
[경향잡지, 199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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