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억압과 고된 종살이에서의 탈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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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3-23 | 조회수5,312 | 추천수0 | |
[하느님 뭐라꼬예?] 억압과 고된 종살이에서의 탈출
하느님 약속의 성취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탈출 1,1) 탈출기는 ‘사제계’의 문체로 기록한 야곱 자손들의 족보를 소개하고, 이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시게 되는 배경을 간략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야곱의 몸에서 난 일흔 명 가운데 요셉이 먼저 이미 이집트에 가 있었다, 그 뒤 요셉과 그 형제들과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졌다, 그리하여 이집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을 지키셨고 그것이 실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7-18)는 하느님 말씀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탈출기는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탈출사(脫出史)를 전하면서 그 선사(先史)로 일찍이 선조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한 하느님의 축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까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당신께 순종하는 자녀에게 우선적으로 내려지는 것 아닐까요? 게다가 그 축복은 한 개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두루 그 후손들에게까지도 내리게 되는 성격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떠한 자세로 하느님의 축복을 바리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 않고서 그분의 축복을 바라기만 하는 건 아닌가요? 하느님의 축복이 없다 한탄하고 있지나 않는가요? 나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축복은 왜 이리 부족하냐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나요? 혹시 그러한 나라면 먼저 하느님께 충분히 순종하지 못한 나 자신부터 돌아보아야겠죠!
고된 종살이의 시작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집트 임금이 죽었다.”(탈출 2,23)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탈출 1,8-10)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18세기 무렵 이집트를 점령했던 셈족의 ‘힉소스 왕가’가 이집트를 다스리던 시기에는 비교적 윤택하게 살았지만, 기원전 16세기 이집트인 왕가가 들어서면서부터 고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탈출기의 설명에 의하면, 과거 요셉의 사적(史蹟)을 모르는 후대 파라오들이 야곱의 자손들을 종 다루듯 했고,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많고 강해져 후일 이집트인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탈출기는 그렇게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탈출 1,11) 실제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 제19왕조인 라므세스 2세 치하 때 (기원전 1290-1224) 셈족의 인력을 이용, 나일강 삼각주 고센 지역에 곡식을 저장해 둘 도시인 ‘피톰’과 ‘라므세스’를 세운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 동원된 셈족이 바로 요셉 이후 이집트에 정착하여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가는 다음 기록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탈출 1,13-14)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는 표현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종살이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된 노동으로 혹사당해야 했던 것이지요. 때로는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쓰라린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탈출기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억울한 종살이와 같은 삶에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 우리가 그 하느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을 때 그 고된 삶으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짐을 잊지 맙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노예의 신분이었음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예였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 취급한 이집트 사람들을 증오하기보다 오히려 그 속에서 그러한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손길이 미쳤음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은 어떠한지요? 나의 실수나 잘못, 혹은 불가항력적으로 당했던 부끄러운 일이나 수치스러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러함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셨던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나의 수치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자부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청합시다!
억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탈출 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인들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불어났고 더 강해졌습니다.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워할 정도였지요.
이에 이집트 임금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말했지요.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탈출 1,16) 임금의 명령이었지만 산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이스라엘의 아이들을 살려주었습니다. 마침내 파라오는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 1,22) 이로써 모세의 탄생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파라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권력자의 명령이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따르지 않을 용기, 이러한 용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산파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축복이 어떠하였나요? 탈출기는 말합니다. “산파들이 하느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집안을 일으켜 주셨다.”(1,21) 당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의(義)를 행하는 이에게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합시다!
인간의 탄식과 하느님의 응답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3-25) 이집트에서 비참한 종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이 고역 속에서 탄식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살펴보시고 구해주시려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마음은 모세를 구해 사명을 맡기시고 구원을 준비하심으로써 드러난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 이 구절을 칠십인역 성서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고 계시(啓示)하심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탄식’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직관(直觀)’과 관련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께 부르짖을 때, 내가 하느님께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바로 그때가 하느님께서 나를 잘 알게 되실 때이고, 하느님께서 나의 처지를 잘 알게 되실 때이며, 또 바로 그때가 당신께서 나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뵙고자 하면, 당연히 그분께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탄식하는 일에도 힘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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