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생활 속의 성경: 정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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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5-10 | 조회수3,046 | 추천수0 | |
[생활 속의 성경] 정원 (1)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생활 속의 성경에서 다루어야 할 집의 장소 중 일곱 번째가 ‘정원’이어서 내가 사는 집 앞에 ‘정원’이 생긴 것이. 아파트 생활이 보통이 되어버린 우리네 주거 환경에서 정원이 생긴 것은 분명 크나큰 축복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되면 어김없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치열하게 드러내는 푸른 빛 생명체들의 등장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은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에겐 축복이기보다 부담에 가깝다.
풀을 뽑으려 쭈그려 앉아봐도 언뜻 보기에 똑같아 보여 무엇이 잔디고 무엇이 잔디가 아닌지 구별해 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어쩌면 그렇게도 해와 달의 눈을 피해 몰래 훌쩍 자라버리는지, 이 생명체들을 대하고 있자면 한 정원을 한 번에 한 사람의 힘만으로 가꾸어 내는 것이 턱없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여러 번 더 많은 사람이 호미질하는 수고를 요청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어떤 신경도 쓰지 않고 고된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콘크리트라는 딱딱한 소재로 바닥을 말끔하고 시원하게 깔아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기도 한다.
하느님의 정원에서도 이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푸른 빛 생명체’가 있을까? 하느님의 세상 창조 이야기를 묘사하는 성경 첫 부분은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날의 흐름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의 정원을 조성하신다. 너무도 잘 짜여 정돈된 이 이야기 안에는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스름한 생명체들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창조의 단계마다 하느님의 엔딩크레딧처럼 등장하는 말이 ‘보시니 좋았다’여서 모두 다 환영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날, 각기 다른 존재가 그 정원 안에 다 함께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조화롭게 자리 잡는다.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하느님과 닮은 존재’(창세 1,26.27 참조)인 인간. 정원을 다스린다. 조금 결이 다른 창세기의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창조 목적이 인간의 “협력자”(창세 2,18)가 되기 위함임을 말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다양한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협력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좋으심’ 혹은 ‘선하심’을 드러내는데 돕는다는 뜻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40항 참조). 인간에 의해 이름 붙여진 존재들은 그들이 지닌 다양성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을 풍요롭게 표현한다.
하느님 정원의 피조물이 자기 창조 목적인 인간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만약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는 피조물 각자가 지닌 하느님의 선하심의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할 때이다. 그런데 인간은 정원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받았으므로 자연스럽고도 아이러니하게 화살의 끝은 인간을 가리킨다. 정원에서 하느님의 다양함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환영받지 못하는 푸른 빛 생명체’는 사실 인간 안 정원의 빈틈에 존재한다.
해가 찬란히 빛나고 달이 은은히 빛나는 것처럼 하느님의 피조물은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하느님의 정원인 대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 역시 그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은 고단하다. 축복과 부담 사이에서 그리고 호미질과 콘크리트 사이에서 방황하는 선택의 자유 때문일 것이다.
써걱대는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호미질 소리가 들린다. 일단 정원으로 나가 봐야겠다. [2021년 5월 9일 부활 제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생활 속의 성경] 정원 (2)
하느님께서 세상이라는 정원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괜히 심통이 날 때가 있다. 첫째 날은 이렇고 둘째 날은 이렇고… 해서 여섯째 날까지 하느님께서는 열심히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인 일곱째 날에는 휴식을 취하신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에 휴식을 취하셨으니 구약의 백성들도 당연히 이 일곱째 날에 휴식을 위해 노동을 금한다는 사실이다. ‘아니 이왕 쉬실 바에야 육 일을 일하셨으니 당연히 육 일을 쉬셔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그게 공평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가?’ 누군가 이 게으른 생각을 향해 그나마 육 일이 아니라 오 일 일하는 것도 다행이라고 또 일곱째 날이라도 하느님께서 쉬신 것을 감사하게 여기라고 엄근진의 눈빛과 음성으로 말한다면 ‘아멘’이라 하겠지만 그 대답은 마른 나무가 한숨 쉬는 소리에 비슷할 것만 같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쉬시는 날이기도 하지만(탈출 20,11 참조), 종살이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탈출시킨 하느님의 업적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다(신명 5,14-15 참조). 그렇기에 부유한 사람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이날 쉬면서 자유를 주신 하느님을 기억한다. 하느님께서 쉬셨기 때문인 것도 좋고 또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하느님의 업적을 기억하는 것도 좋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하느님께서 ‘자유’로 이끄셨다는 데에 있다. 곧 쉬고 기억하는 일을 하고 하지 않고에 대한 결정은 결국 인간의 자유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 자리를 내어주시면서까지 하느님은 그들이 저지르는 불복종의 위험을 꼭 감수하셔야만 했을까?
우리가 가진 하느님 이미지 중에는 ‘언제나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확실한 보험과 같은 하느님’이 있다. 그런데 보호를 명목으로 ‘이럴 때는 이렇게만, 저럴 때는 저렇게만’ 혹은 ‘이것만이 최선이야’라고 말씀하시며 그 어떤 자유 없이 수천만 개 CCTV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종하시는 하느님을 과연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너 왜 내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라는 말이 메아리치는 환경, 자유 없이 오직 한 길만이 요구되는 상황에서야말로 마른 나무 한숨 쉬는 소리가 하늘에 닿을 것만 같다(탈출 2,23 참조). 잘 생각해보면 이런 사회를 움직이는 이는 하느님이라기보다 독재자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에 속한 구성원은 누구나 빠짐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오직 독재자에게 복종하는 의무만 존재한다. 자유가 없으니 자신의 고유함을 드러낼 수도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 각자에게 자유의 자리를 내어주신 것은 그 자유를 통해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본연의 모습이 드러내기 위함임을 추측하게 한다. 곧 인간은 인간에게 부여된 궁극적인 목적을 각자가 지닌 자유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육 일 일했으니 육 일 쉬어야 한다는 인간적 고정관념에 묶인 하느님을 자신의 자유로 풀고, 나아가서는 경제적 고정관념에 묶인 내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자유로 풀어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자유와 연결된 안식일, 안식일과 연결된 칠 일간의 창조는 내가 나 자신이 되어간다는 차원에서 일회적인 성격이나 일정한 직선의 성격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성격을 취한다. 이 다시 시작하는 성격은 모든 타락한 부분을 압도하여 새로운 내일을 향해 계속해서 단계적으로 나아가게 한다. 창조의 과정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 하느님의 자유가 인간에게서 발휘되는 순간이며 하느님의 정원에 꽃이 피는 순간이다. [2021년 7월 11일 연중 제1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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