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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역사 = 주석된 사실 (意味史, truth)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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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25 조회수1,641 추천수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경상의 이스라엘 역사는 단순히 “사실”, 곧 “객관적 사실(事實史, fact)”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주석된 사실”(意味史, truth)”이라고 한답니다.

환언하면, “객관적 사실”에다가 신앙적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한 “주석된 사실”이라는 뜻이겠죠 !

(이하 인용자료임)

일반 역사 : 객관적 사실 (事實史, fact) 과거 시점

성서 역사 : 주석된 사실 (意味史, truth)

예) 춘향전 : 여인의 절개를 얘기하기 위해 인물을 설정했다.

즉, 알맹이를 전하기 위해 껍데기(캡슐, 당의정[糖衣錠])를 씌운 것이다.


사전적으로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하는 말이고,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 사실'을 뜻하는 말입니다.(인터넷에서 검색)

‘진리’(眞理)는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혹은 참된 이치나 법칙을 뜻한다. 참, 진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위키백과)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적 사실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 체험을 통한 신앙고백서라고 할 때,

그 모든 기록들을 우리는 “진리”(참, 진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



<이하 참고 글 >

하느님이 사람에게 청한다. (루카 1,26-38)

-박상대신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한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복음이 봉독된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예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예고의 서막(序幕)이었다. 요한의 탄생예고는 오직 그리스도의 탄생예고 때문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선구자는 선구자 다음에 도래하는 메시아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된다. 서막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본막(本幕)의 준비를 위해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요한의 탄생예고로 말미암아 인간의 세상에 "새로운 무엇"이 시작되었다면 예수의 탄생예고는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바로 인간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즉 구원자요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본막을 위한 서막의 존재, "무엇"의 예고와 예고된 "무엇"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은 두 개의 탄생예고사화를 비교해 봄으로써 가능해진다. 루가는 요한의 탄생예고에서와 같이 예수의 탄생예고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명확히 하고 있다. 시간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지 정확히 여섯 달째 되는 때였다. 이는 새로운 무엇이 인간 세상에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난 때이다. 이제는 시작된 그 무엇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밝혀지는 때이다. 장소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이다. 요한의 경우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도 예루살렘의 성전이었지만, 여기는 변두리 어느 한 마을이다. 즈가리야는 분향을 위해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그곳에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게 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어 찾아온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는다. 즈가리야는 천사의 인사도 없이 바로 메시지를 전해듣는다. 그러나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천사의 인사를 받고 난 다음 메시지를 전해듣는다. 놀라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즈가리야의 경우는 이미 늙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고, 마리아의 경우는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스스로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즈가리야는 의심이 앞서 믿을만한 표징을 요구했고, 마리아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묻는다. 즈가리야는 불신의 대가로 벙어리가 되어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면서 엄청난 메시지를 겸손과 순명으로 수용한다. 그 순간 예수는 이미 마리아 안에 잉태된 것이다.

마리아 안에 잉태된 아기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을 가진 "예수"라 불릴 것이며, 그는 조상 다윗의 왕위를 받아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예수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주님이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와서 세상 사람들이 이 주님을 맞아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요한은 구약성서에서 흔히 있었던 아이를 낳지 못한, 그러나 나중에 야훼의 안배로 아이를 낳은 여인들, 즉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창세11,30; 17,17; 18,11-14),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창세 25,21), 마노아의 아내요 삼손의 어머니(판관 13,2-3), 엘카나의 아내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1,5) 등과 같은 처지의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사상 초유(初有)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남자를 모르는 동정녀가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다.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설(說)이 구구하다. 동정녀 잉태는 분명 우리 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 안에 자리잡은 신앙조목이다. 신앙조목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잉태를 믿는다, 또는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정녀 잉태에 대한 토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이 신앙의 조목이 사실사(事實史)인지 의미사(意味史)인지에 대한 구별이다. 이 구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구별은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다. 이는 이성과 감성이, 철학과 신화가, 로고스와 뮈토스가 동시에 인간정신세계에 속해있는 것과도 같다. 동정녀 잉태가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건의 한 편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건은 다른 한 편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정녀 잉태의 문제를 인간의 측면에서 해결하려 들면,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다. 동정녀 잉태는 세상 안에 통상 존재하는 수백만 잉태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남녀의 관계를 통한 생물학적 잉태만을 정상적으로 인정하는 세상의 눈은 동정녀 잉태를 생물학적 이변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하느님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되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마리아의 수용에 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의 육(肉)을 취하는 길이며, 육을 취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적 관계를 배제하는 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스스로 마리아를 찾아가 동의를 구하셨고, 마리아의 동정성을 겸손과 순명으로 받으신 것이다. 구약의 석녀(石女)들은 그 청이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나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찾아가 청을 건넴으로써 마리아는 다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은 여인이 된 것이다. 주님의 성탄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는 사건이다. 우리 안에 인간이 되시고자 청을 넣으러 오시는 것이다. 인간이 되시려는 하느님의 청에 나는 과연 무엇이라 답을 드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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