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장-----송영진 모세 신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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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4-10-13 | 조회수938 | 추천수0 |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8장>
8장
<1절-17절 :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
1절-2절..(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 다.> (2)<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앞의 7장 24절에서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는가?' 라고 묻고, 7장 25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라고 했던 바오로는 이제 8장 1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 다.' 라고 선언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죄의 법에서(죄에서) 풀어주지 못했지만, 하느님께 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은총은 인간을 죄의 법에서(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습 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이들은 죄와 벌에서 해방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고, 단죄 받을 일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이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일치해서 그리 스도와 함께 사는 이들입니다. '단죄를 받을 일이 없다.' 라는 말은 죄인으로 심판받을 일 이 없다는 뜻입니다. '단죄'는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2절은 1절의 '단죄를 받을 일이 없다.' 라는 말의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앞의 7장 6절에 서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다.' 라고 말한 것을 다시 이야기한 것 인데, 율법이 하지 못한 일을 은총이 해주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은총으로(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리 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 도의 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 예수님께 생명을 주신(부활시키신) 하느님의 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를'이라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나를'이라고 번역했고, 200주년 성서는 '당신을(예 수님을)'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필사본의 차이입니다. 8장의 내용 전체를 볼 때 200 주년 성서의 번역이 적절합니다. 그래서 2절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생명을 주신(부활시키 신) 하느님의 영이 당신을(예수님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에' 라는 뜻이 되고, 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이들도 그 영을 통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다는 뜻 이 됩니다. 여기서 '성령의 법'은 그냥 '성령'이라는 뜻이고, '죄와 죽음의 법'은 그냥 '죄 와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가 '법'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율법과 대조를 이루기 위 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인간에게 작용하는 하나의 힘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 로도 보입니다. 여기서는 '법'이라는 말 자체에 크게 중요한 뜻은 없습니다.
3절..<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곧 당신의 친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3절의 뜻은, 율법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십자 가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이라는 말은 '인간 본성의 나약함 때 문에 율법이 이룰 수 없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원문대로 직역하다가 뜻이 잘못 전달될 수 있는 번역을 했습니다.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라는 말은 '인간의 육 적인 나약함 때문에', 즉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나약한 본성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율 법이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율법이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이루지 못했음을 가리킵니 다. '하느님께서 이루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죄 많은 육의 모습'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의 모습 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는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십자 가에서 죽으시어' 라는 뜻입니다.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다.' 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죽 으심으로써 죄를 없애셨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육'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4절..<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 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은 '율 법의 원래 목적이 달성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원래 목적은 사람을 하느 님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 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 일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주신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즉 육체의 욕망대 로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8절..(5)<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 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6)<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 입니다.> (7)<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느님 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8)<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 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5절-8절은 4절의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설명입니다.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체의 본성에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육에 속한 것', 즉 세속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속한 것' 은 영적인 것, 하느님의 것, 영혼에 관한 것 등을 뜻합니다. 6절의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라는 말은 '육에 속한 것'만을 생각하면서 살게 되면 그 결 과는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 라는 말은 참으로 영적인 생활 을 하게 되면 생명과 평화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참된 생명과 평화는 하느님에게서 오 기 때문입니다. 7절은 6절의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라는 말을 설명한 구절입니다. 육체적이고 세속적이 고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생활은 곧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생활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 을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들의 삶 은 하느님의 은총과 반대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뜻, 가르침, 계명' 등을 뜻합니다. 8절의 뜻은 '육을 따르는 자들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다.' 라는 말의 원문을 직역하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가 없다.'인데, 하느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는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8절을 원문대로 직역했는데, 새번역 성경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 다.' 라고 의역을 했습니다. 8절은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이 더 적당합니다.)
9절..<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9절은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설명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하느 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같은 성령입니다. 따라서 9절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 것 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사신다, 또는 성령을 모신다는 말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에 따 라 성령과 함께 사는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은 곧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의 일치를 뜻합니다.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다.' 라는 말은 4절의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일치해 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10절..<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이 구절은 앞의 6장 4절에서 했던 말과 같은 내용입니다.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이라는 말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라는 말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의롭게 되고, 그 의로움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 명에 참여하게 되고, 우리의 영은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한 조건은 '그리 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것,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번역 성경이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라고 번역한 말을 공동 번역 성서는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로 번역했는데, 새번역 성경이 틀렸고, 공동 번역 성서가 맞습니다. 10절은 몸은 죽어도 우리의 영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 해서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면 죄 속에 있던 몸은 죽고 영은 살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이 살아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11절..<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 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 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이 구절의 뜻은 '우리가 성령과 함께 산다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을(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분, 즉 하느님을 뜻합니다. 하느님 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시켜 주시는데, 조건은 성령과 함께 살아 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성령에 따라' 사는 것, 또는 그리스도와 일치해 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앞의 10절에서는 몸이 죄 때문에 죽었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죽을 몸'이라고 표 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몸이면서 동시에 부활과 생명을 얻은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 살지 않으면 '죽을 몸'이 되고 말 것입니다.
12절..<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육에 빚을 졌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12절은, 우리 는 세례를 받고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니 마치 육에 빚진 사람처럼 육체의 욕망에 끌 려 다니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13절..<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육에 따라 살면', 즉 세례 받기 전에 살던 모습대로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니 세례를 받은 후에 도 자만하지 말고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욕망과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면'이라는 말은 '육체의 욕망과 유혹에 대항해서 싸워 이기면'이라는 뜻입니다. '살 것입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말인데, 이 말이 미래형 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시작된 그 생명이 지속되고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했다는 것은 생 명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동시에 더욱 강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14절..<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바오로는 앞의 6장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자녀' 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을 섬기는 입장 에서 인간 쪽의 표현이고,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 쪽에서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 는 관점에서의 표현입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을 섬겨야 하지 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과 같은 뜻입니다.
15절..<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 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 라' 라는 말은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을 무서워해서 섬기는 생활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하느님께 대해 품고 있던 감정은 주로 공포심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무서워서 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시대 유대 인들과는 달리 하느님이 무서워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무서 워서 떠는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서 '자녀'는 원래 '양자'를 뜻하는 단어인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 켜 주시고, 당신의 양자로 삼아주셨음을 뜻합니다.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여 러분을 자녀로 삼으셨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친다.' 라는 말은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 아 하느님께 우리의 신뢰감, 사랑, 친밀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인데, 자녀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빠' 라는 말은 당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아람어 단어입니다. '아빠(abba)' 라 는 말은 우리말의 '아빠'와 음과 뜻이 똑같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른 예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16절..<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 다.>--이 구절은,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신다.' 라는 말 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한 영적인 체험, 또는 확신으로 해석됩니다. 공동번역 성 서는 이 구절을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라고 의역했습니다.
17절..<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 아야 합니다.>--양자라고 해도 친자녀와 똑같은 유산 상속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 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 신 유산 상속은 부활과 영원한 영광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부활과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이르신 것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일치해서 살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겪 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라는 말은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일부러 고난을 찾아다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고난을 겪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겪는다 는 마음으로 그것을 견디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 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18절-30절 : 고난과 희망과 영광>
18절..<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에 대해서는 뒤의 35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등입니다. 그런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과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즉 나중에 받게 될 영광을 생각한다면 고난을 충분히 참고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될 영광'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19절..<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여기서 '피조물'은 인간을 제외한 일반 피조물계를 뜻합니다. 바오로가 갑자기 피조물을 이야기하 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은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에 바오로는 물질세계도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인간들이 구원 받기를 피조물도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도 그 구원에 참여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20절..<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이라는 말은 '피조물이 쓸모없게 된 것은'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피조물이 제 구실 을 못하게 된 것은'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의 번역은 많이 어색하고 이상합니 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신 이유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고 인간과 함께 하느님 을 찬양하고 섬기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은 사람에게 참 행복을 줄 수 없 는 '덧없는 것, 쓸모없는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습 니다. 이 말은 창세기 3장 17절에서 하느님께서 땅을 저주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땅이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즉 땅에게는(피조물에게는) 책임 이 없습니다. 저주를 받았지만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21절..<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 을 것입니다.>--인간들이 죄에서 벗어나 구원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스러운 자 유를 얻게 되면 땅의 저주도 풀릴 것입니다.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라는 말은 피조물계도 덧없고 쓸모없는 상태에서 벗어나 본래의 목적대로 그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함께 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란 인간과 피 조물계가 모두 함께 구원을 받고 함께 자유를 누리는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22절..<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 다.>--인간들이 구세주를 기다리면서(구원 받기를 기다리면서)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서 탄식하면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들도 인간들과 함께 구원을 기다리면서 탄 식하고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공동체로서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 함께' 라는 말은 '우리와 피조물이 함께' 라는 뜻입니다. 따 라서 '우리와 함께'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23절..<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 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여기서 '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빼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온 우주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첫 시작은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첫 선물로' 받았습니다. '첫 선물'은 구원의 시작을 뜻 합니다. 즉 우리가 받은 성령은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고, 종말에 구원을 받게 된다 는 것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우리도 탄식하고 있다는 말은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 고 진행 중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탄식'은 7장 24절의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 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가?" 라는 외침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 의 완성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속량되었지만 이것 은 시작일 뿐이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속으로'는 직역하면 '우리 자신 안에서'인데, '내적으로', 또는 '마음속 깊이' 라는 뜻이고, 우리의 갈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24절-25절..(24)<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 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 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을 받았지 만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구원의 보증이긴 하지만 구원 자체 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하느님 의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희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 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희망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고, 따라서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확실 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희망하던 일이 이루어지면 '희망'의 역할은 끝납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는가?' 라는 말은 우 리가 바라고 있는 일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희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바라던 일들이 모두 이루어지면 '희망'이라는 것의 역할은 끝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5절의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라는 말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 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라는 말은 사실상 '인내심 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라는 말입니다.
26절..<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 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라는 말은 우리가 탄식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는 것 처럼 성령께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와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는 하느님 의 자녀로서 기도하는 방식을 아직은 완전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 이 필요합니다. 바오로는 이미 앞의 15절에서도 우리가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 버지라고 외친다고 말했었는데, 성령께서 도와주셔야만 우리가 제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 다. '말로 다할 수 없이' 라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성령 의 탄식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고,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으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 라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가 해야 할 기도를 대신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도와주시고 그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주신다는 뜻입니다.
27절..<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 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마음속까지 살펴보시 는 분'이라는 말은 원래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는 하느님과 성령의 마음과 생각이 일치해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 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고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신다는 말은 성령의 간구가 하느님의 의향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간구는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성도로서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8절..<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성도들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들'이고, 동시에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란 사람 쪽 에서 표현한 것이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란 하느님 쪽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앞에서 말했던 고난, 탄식, 희망, 성령의 간구 등을 모두 가리킵니 다. '선'은 '구원'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들이 '함께 작용하여' 구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분의 계획', 즉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기 때 문에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라는 말은 '우리는 확신한다.' 라는 뜻입니다.
29절..<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 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29절은 앞의 28절에서 말한 '그분의 계획'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미리 뽑으 셨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성도로 부르 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일을 하실 때 모든 일을 기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실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으 로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계획, 또는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표 현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말은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도 포함합니 다. 세상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미리 뽑으시고, 미리 정하셨다.' 라는 말은 각 개인의 구원이나 멸망이 미리 예정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하느님께서 어떤 개인을 구원하거나 멸망시키기로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예정을 집단적 선택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리 뽑으신 이 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뽑힌 사람들 속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의 노 력도 필요합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의 섭리나 계획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 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으로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 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닮도록'이라는 말인데, 우 리가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닮는다는 말 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같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맏 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는 말을 보충 설명한 것입니다.
30절..<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이 구절은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 되는 과정과 순서를 설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셨고, 그들을 부르셨고, 의롭 게 하셨고, 그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마지막 영광은 아직 얻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이 모 두 과거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과거 형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신자들이 할 일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31절-39절 :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 31절-39절은 지금까지 한 말의 결론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바오로는 여기에서 신앙과 희망의 확신, 승리의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1절..<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 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앞의 28절-30절에서 말했던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 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고난과 박해를 겪어도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라는 말은 어떤 고난이 와도 우리는 패배하지 않는다, 또는 꺾이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설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하느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 니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우리 역시 하느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 편에 서서 죄악과 싸워야 합니다.)
32절..<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증거는 친 아드님, 즉 예수님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리 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 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 입니다.
33절-34절..(33)<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고, 우리를 위 해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심판 법정에서 우리를 고소(고발, 단죄)할 자는 없습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기 때문에(우리를 죄 없다고 해 주시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고소(고발, 단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우리를 고소한다면 그것은 곧 우 리를 의롭게 해 주신 하느님을 고소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또 그분은 부활하셔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 분입니다. 즉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시기 때문에(간구해 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 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고발할 사람이 딱 한 명 있기는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자기 자 신이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죄 속에서 산다면 나중에 자기가 자기를 고발하고 단죄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35절..<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 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사랑 을 거부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고, 우리가 받게 될 구 원, 영광, 생명을 뺏을 수 없습니다.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 등은 바오로가 실제로 겪었던 고난들인데, 바 오로는 그런 고난들도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뺏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 은 우리가 그런 고난을 겪어도 그것들보다 훨씬 더 큰 힘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뜻입니다.
36절..<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 처럼 여겨집니다.">--바오로가 시편 44장 23절을 인용한 것은 앞의 35절에서 말한 고난 들을 다시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에 기록된 내용과 같은 참혹한 박해와 고 통을 실제로 겪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도 우리를 꺾지 못합니다.
37절..<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이 구절은 35절에서 했던 말을 표현만 바꾼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고난 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시련을 겪더라도 포기하지 말아 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38절-39절..(38)<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 도, 권능도,> (39)<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 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바오로는 어떤 힘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 어떤 힘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강하다는 뜻인데, 바꿔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어떤 악한 힘도 다 물리칠 수 있다는(쳐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만 사랑하면서 어떤 악의 힘에도 굴복하지 말아야 합 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 삶, 천사, 권세, 현재의 것, 미래의 것, 권능, 높은 곳, 깊은 곳,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 등은 모두 그리스도와 맞서서 동맹을 맺고 있는 '악의 힘들' 을 나타냅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악의 힘으로 해석됩니다. '삶'은 사람을 세속의 쾌락과 현세적인 생활에 집착하게 만드는 악의 힘으로 해석됩니다. '천사, 권세, 권능'은 악한 천 사, 타락한 천사, 즉 사탄입니다. '현재, 미래'는 시간 안에서 작용하는(시간에 따라 작용 하는) 악의 힘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습니다. 덧없는 세월의 허 무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높은 곳, 깊은 곳'은 우주적인 어떤 악의 세력(힘)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앞의 35절에서 말했 던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 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같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지 말라.' 라는 권고로 생각됩니다. ----------------------
<묵상>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공동번역, 마르코 11,24)
우리는 구원을 받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것은 올림픽 결승전에서 이기고 시상식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직 금메달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 희망은 그 정도로 확실한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희망입니다. 약속을 백퍼센트 지키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희망은 항상 불확실합니다. 바라는 것이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희망에는 불확실성이 없습니다. 구원의 희망은 희망 자체로 곧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하고 있다는 것은 곧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의 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해서 희망을 잃는다면 그것은 이미 받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과 포기는 결승전에서 이긴 선수가 금메달을 버리는 일처럼 어리석고 허망한 일이 될 것입니다.
2009. 11. 20. 송영진 모세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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