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돌아가는 여정, 돌아보는 여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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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7-02 | 조회수4,060 | 추천수0 | |
[하느님 뭐라꼬예?] 돌아가는 여정, 돌아보는 여정
먼 길을 돌아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때,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갈대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탈출 13,17-18)
이스라엘 백성은 라메세스를 탈출, 마침내 430년간의 이집트 생활을 마감하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가축 떼에 함께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60만 가량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무리였습니다. 그 길은 출애굽기를 비롯하여 여호수아기에 이르기까지의 성경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장장 40년간이나 걸린 멀고도 험했던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라메세스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곧바른 길을 두고 최소한 2배 이상, 거의 3배 가까이나 더 걸리는 먼 길을 돌아서 갔다는 것입니다. 그 여정은 나일강 삼각주 동쪽 지역에서 출발, 시나이반도 남쪽 시나이산(호랩산)을 거쳐 사해 서쪽 지역까지, 지중해 쪽이 아닌 홍해와 아라비아해 쪽으로, 즉 우회를 해서 어렵게 목표를 향한 한마디로 ‘빠른 길이 아니라 느린 길’이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느님의 배려라고 탈출기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과 정착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게 될 전쟁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그들을 준비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시험과 단련의 때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신명 8,2)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한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많은 시련과 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많은 불평과 잘못을 하느님께 하였고, 진노한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그 광야를 지나 마침내 약속의 땅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광야에서의 시련과 시험의 시간을 통해 조금씩 단련되고 정화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머무른 40년이라는 긴 기간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고 단련시킨 때’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의 정착은 결과적으로 광야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친히 당신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해내셨고, 광야로 그들을 이끌어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가셨습니다. 당신 친히 그들을 먹여주셨고 지켜주셨습니다. 이렇게 광야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놀라우신 위업을 이루신 때’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척박한 땅에서 ‘오직 하느님의 인도하심에만 의지하는 충실성을 보인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를 찾기 위해 광야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도 헤로데의 학살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을 떠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광야의 길을 두 번이나 거쳐야만 했지요. 우리 사람들의 인생길도 광야의 길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 쉬운 길이란 참 드물지요. 아니 쉬운 길이란 애초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 길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나를 단련시키고 준비시키는 은혜의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빙빙빙’이란 노랫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먼 길을 돌아 먼 길을 돌아 돌아올 거야. 빙빙빙 돌아올 거야.” 우리 인생길에는 지름길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길에는 하나의 길만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때로는 돌아가야만 하는 길도 있는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우회하는 길이 더 빠르고 더 나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먼 길을 돌아가는 길은 결코 바보스럽거나 미련한 길이 아님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길은 더 큰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에 함께하실 분, 그 길의 끝에서 날 기다리고 계실 하느님을 잊지 맙시다!
구름 속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탈출 13,21-22) 가장 가까운 길을 두고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헤매도록 버려두시지 않고 놀라운 방법으로 안내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너에게 다가가겠다.”(탈출 19,9) “그때에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탈출 40,34) “내가 구름 속에서 속죄판 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레위 16,2)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1열왕 8,10) “그분(주님)께서 하늘을 기울여 내려오시니 먹구름이 그분 발밑을 뒤덮었네.”(시편 18,10) “구름과 먹구름이 그분(주님)을 둘러싸고 정의와 공정이 그분 어좌의 바탕이라네.”(시편 97,2)
위에 제시한 구절들이 보여주듯, 성경에서 ‘구름’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하시면서 인간에게 오심을 나타내는 상징에 속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예배할 때에는 하느님의 현존이 구름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탈출기가 전하는 구름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그들을 동행하면서 주님의 현존을 암시해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 백성을 이끌어가셨습니다! 놀라운 방법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감동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도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었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고개를 들어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볼 때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봅시다.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쉽게 변하는 마음에 주님의 축복은 없다!
“우리를 섬기던 이스라엘을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하였는가?”(탈출 14,5)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접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달라져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임을 알리기 위해 허락하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뒤를 쫓았다.”(탈출 14,8)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너희를 뒤따라 들어가게 하겠다. 그런 다음 나는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탈출 14,17-18)
하느님이 허락하셨다고 해서 파라오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파라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수많은 재앙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손해에 마음이 변했고, 완고했던 그와 신하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당당하게 나아갔지만’ 자신들을 잡으려고 다가오는 이집트인들을 보고서는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탈출 14,11-12)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변해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결국엔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랐기에 파라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인도했던 모세가 변함없는 자세로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며 역할을 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께 순명하며 두려움을 떨쳐내고 갈라진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마음이 쉽게 변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것도 쉽게 변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지요? 그런 나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자면 얼마나 힘드실까요? 신앙생활의 기본은 변함없는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일 것입니다. 탈출기를 읽으며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쉽게 변하는 마음에 하느님의 축복은 없음을, 한결같은 마음에 하느님의 축복이 선물이 됨을!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7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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