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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루카 복음서 18장 22절-43절-----송영진 모세 신부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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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4-12-21 조회수1,470 추천수0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루카 복음서 18장 22절-43절>


 


18장


 


22절..<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셨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예수님은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라는 말은 완전하게 지켰다고 말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라고 의역했습니다.) 그의 부족한 점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세상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린다면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고


    원하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


    어 주어라.' 라는 말은 새로운 계명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십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부족했던 것을 채워 넣으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의 뜻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것


    이고 자선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과 자선을 실천하는 것


    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라는 말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포기하라는 뜻인데 이 말은 '나


    를 따라라.'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사도들처럼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명령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즉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만 실제로 모든


    재산을 버리는 일은 사도직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여기서 재산을 가난


    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은 단순히 불우이웃 돕기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넓은 뜻


    으로 적극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 사랑도 부족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은 세상의 재물을 버리면 하


    늘의 보물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는 말은 사도직의 대열에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열두 사도 안에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라 넓은 뜻의 사도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명령이지만, 제자가 되라는 말은 그 사람


    에게 하시는 권고입니다.)


 


23절..<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그 사람은 율


    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고 예수님을 존경했지만 재산이라는 장애물은 극복하지 못했습니


    다. 루카는 그가 매우 슬퍼하였다는 말만 쓰고, 떠나갔다는 말은 생략했는데 (마태오복음


    과 마르코복음에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슬퍼했다고만 써도


    뜻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큰 부자였다.' 라는 말은 실제로 큰 부자였


    다는 뜻이지만 재산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 있습


    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되는데,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우선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자는 자신이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결국 자신은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슬픔과 고통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24절..<예수님께서는 그가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아마도 그 부자는 슬퍼하면서 그냥 떠났을


    것입니다(마태 19,22 ; 마르 10,22). 예수님은 그 부자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시면서 부자


    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냥 사람들에게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예수님 말씀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는 말은, 이 세상과 재물에 대한 애착은 하느님 나라에 들


    어가는 길을 막는 큰 장애물이라는 뜻입니다.


    (24절과 25절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다.' 라는 뜻은 아


    닙니다. 여기서 '부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재산에 대한 애착도 많은 사람으


    로 보아야 합니다. 재산이 많다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재산이 많을수록 애착도 커지


    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25절..<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예수님은 앞의 24절에서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셨는데, 25절에서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라고 다시 설명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낙타'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가장 큰 동물이었습니다. '바늘귀'는 가장 작은 구멍을 뜻합니다. 그


    래서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는 가장 큰 동물이 가장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못 들어간다는 것


    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6절..<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여


    기서 '구원 받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


    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재산을 하느님의 축복의 표시로 생각했고, 부자는 하느님의 축복


    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여겨


    지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라


    고 묻고 있습니다.


 


27절..<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사


    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라는 말은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


    능한 일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


    고 은총에 의지한다면 구원을 받는 일은 가능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롭게 되는 일은 정말 어렵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할 수만 있다면 애착을


    버리고 자유롭게 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아


    끼는 마음이 더 큰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여간에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을 의지한다


    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8절-30절 : 따름과 보상>


 


28절..<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


    니다.">--제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물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앞의 23절에서


    부자가 하지 못한 일을 제자들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베드로의 말은 '가진 것


    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습니까?' 라는 뜻입


    니다. 여기서 '가진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가정'이라고 번역했는


    데, 원문대로 하면(문맥을 보아도) '가진 것'이 더 적절한 번역입니다. '가진 것'이란 가정


    과 재산을 포함해서 모든 소유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번역 성경은 '스승님'이라


    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서는 '주님'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그냥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29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


    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예수님은 앞의 14장


    26절에서 가족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


    다. 지금 여기서는 표현을 바꾸어서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가족을 버린 사람은 그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엄숙하게 선언한


    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당신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되


    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 약속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라는 말은 가족을 버리는 일은 하느님의 나


    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집'은 건물보다는 '가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깊고 자연적인 애정과 애착에서 벗어난(초월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은 실제로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족에 대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집착을 하는


    것과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30절..<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예


    수님의 약속은 두 가지입니다. 현세(이 세상)에서는 버린 것의 '여러 곱절'을 받는다는 것


    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


    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1) 영적인 은혜. 2) 교회 안에서 형제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 3)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는 것.


    4) 유한한 세상 것들 대신에 무한한 사랑을 얻게 됨. 이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는 없고 그런 여러 가지 뜻을 두루 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든 예


    수님께서 세속의 부귀영화를 약속하신 것은 아닙니다.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


    라는 약속은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31절-34절 :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31절..<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


    어질 것이다.>--앞의 30절에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말씀하신 예수님이 여기서는 당신


    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면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해야 한다


    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데리고 가시며'를 공동번역 성서는 '가까이 부르시


    고'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하면 '데리고 가시며'가 올바른 번역입니다. '보다시피 우


    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라는 말은 지금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시는 말씀이지만 이 말 속에는 단순히 순례를 하기 위해


    서 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


    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32절-33절..(32)<사람의 아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질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아들


    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침 뱉을 것이다.> (33)<또 채찍질하고 나서 그를 죽일 것이다. 그


    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다른 민족 사람들'이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즉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로마인들)입니다. '넘겨진다.' 라는 말은 유대


    인들에 의해서 넘겨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메시아이신 분을 이방인들에게 넘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


    한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조롱, 모욕, 침 뱉음, 채찍질, 죽임은 이


    방인인 로마인들이 한 짓입니다. 루카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기록한 책이지만 이 구절


    은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이 이방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시는 말인데, 여기


    서 '사흘 만에' 라는 말은 '만 사흘'이 아니라 '사흘째 되는 날'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금요일)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었고 제자들과 여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


    격한 것은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의 이른 아침이었으니까,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었던 시


    간은 만 이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신지 만 사흘이 지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금요일을 첫날로 계산해서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34절..<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


    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과 부


    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셨을 때에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9,45). 그들은 세 번째 예고 말


    씀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라는 말은 제자


    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루카는


    그 이유를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말씀의 뜻을 감추셔서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감추셨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든 이것은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도 하느님의 섭리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때'


    가 되면, 즉 모든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하게 되고


    더욱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유대인인 제자들에게는 메시아이신 분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진다


    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넘겨진 다음의 수난과 죽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없으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도 이


    해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메시아는 이방인을 심판하실 분이고, 이방


    인들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그러니 메시아가 이방인들 손에 넘겨져서 수


    난과 죽음을 당한다는 예고를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35절-43절 :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35절..<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


    걸하고 있다가,>--이 이야기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선교활동의


    절정입니다. '예리코'는 요르단 강 서쪽, 사해 근처에 있는 도시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


    루살렘 근처까지 가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마르 10,46)


    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루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름을 생략하고 '어


    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라고만 기록했습니다.


 


36절-37절..(36)<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사람들이 그


    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눈먼 이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고, 사람들은 그에게 예수님이 지나가


    신다고 알려 줍니다. 여기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말은 '나자렛 출신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예수' 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출신지를 언급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27장 16절을 보면 바라빠도 예수라는 이름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8절..<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


    다.>--그 눈먼 이는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이 메시아


    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았거나 믿더라도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눈먼 이


    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공공연하게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자기에게 기적의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41절에서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9절..<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


    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앞서 가던 이들'은 군


    중의 앞에서 가고 있던 사람들인데 37절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눈먼 이에게 말해


    준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것은 '다윗의 자


    손'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예수님이 하


    시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걸음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거지이며 눈먼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것


    입니다. (말하자면 장애자, 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먼 이는 예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잃을 수 없어서 더욱 큰 소리로 외


    치고 있습니다.


 


40절..<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


    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심으로써 눈먼 이의 외침에 응답하십


    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시고,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십니다.


 


41절..<"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


    십시오." 하였다.>--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


    니라 눈먼 이가 자기의 믿음을 표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음을 믿는다


    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주님'이 아니라 '랍부니' - 선생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루카가


    이방인계 독자들을 생각해서 주님으로 고쳐서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으로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서에


    는 '다시' 라는 말이 없고 그냥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문


    의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다 들어 있고, 문맥에 따라서 번역해야 하는데, 지금의 상황에


    서는 두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면 후천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뜻이 되고 '다시' 라는 말이 없다면 선천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뜻이 되는데, 지


    금의 상황에서는 어느 쪽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42절..<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예수님은 '다시 보아라.' (또는 '보아라.') 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로


    써 그의 믿음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은 병자를 고쳐


    주셨을 때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인데, 신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


    도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43절..<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


    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라는 말은 예


    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바로 기적이 일어났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과 그 자리에서 기적을 목격한 군중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를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곧 하느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


    입니다.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이 태도는 예수님의 기적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믿지 못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


    이는 경우가 많았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태도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군중들 틈에 끼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좀 더 깊은 의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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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부자도 부자 나름입니다.


아리마태아 요셉, 바르나바 요셉, 리디아,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


그들은 부자였지만 바늘귀를 통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는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람들로 기록되었습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도 역시 자기가 하기 나름입니다.


38년이나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었던 병자는


예수님 덕분에 병이 나아서 건강하게 되었지만 바로 가서 예수님을 밀고합니다.


 


부자가 재물에 더 집착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집착이 덜 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집착이 심할 수도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움켜쥐고 집착하는 사람과


가진 것이 없지만 가지려고 집착하는 사람이 무엇이 다릅니까?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누가 감히


자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큰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겸손하게 간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재물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갖 부정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애를 쓰는 사람과


그 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얻으려고


온갖 부정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애를 쓰는 사람이 무엇이 다릅니까?


 


재물이나 권력 외에도 하느님이 아닌 것들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상관없는 세속적인 것들에 욕심내고 집착한다면


모두 다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할 낙타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으로 가난해질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내 것이 아니고,


가질 수 없는 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돈을 벌고 모으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세상이 지속되는 한 인간의 경제 활동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목적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그런 것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수단이고 도구일 뿐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은 하느님에게로 돌아가고


흙에서 온 것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늘귀를 통과하기를 바란다면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면 되지만,


그전에 스스로 낙타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2010. 10. 29.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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