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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야곱(창세 25,19-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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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26 조회수4,189 추천수0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야곱 I (창세 25,19-35,29)

 

 

고대 근동의 현인들에게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적절한 때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코헬렛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고 말하면서, 인생에는 정해진 때가 있고 그것을 결정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라 고백합니다(코헬 3,1-15). 성조 야곱의 삶은 바로 이 ‘때’를 올바로 기다리지 못해 고난을 겪었던 시절과, ‘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을 신뢰하는 성조로 살아간 시절로 나누어집니다. 이러한 야곱의 삶은 우리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지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시는”(1코린 1,28) 하느님은 이미 모태에서 작은아들 야곱을 자유로이 택하셨습니다(창세 25,23). 장차 하느님의 백성을 그의 이름을 따서 “이스라엘”(창세 32,29) 그리고 “야곱 집안”(탈출 19,3; 이사 2,5; 루카 1,33)이라 부르게 될 만큼, 위대한 성조로서의 삶이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한 젊은 시절의 야곱은 전형적인 찬탈자였습니다. 형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후로(창세 25,26), 허기진 형을 꾀어 맏아들 권리를 넘기겠다 맹세하게 하고(창세 25,29-34), 연로한 아버지를 속여 하느님의 축복을 훔친(창세 27,1-29) ‘영리한 사기꾼’일 뿐이었지요. 사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때’를 준비하며 기다리지 못한 것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저 관습대로 맏아들 에사우에게 축복을 전하려 한 아버지 이사악, 야곱의 운명을 알면서도 기다리지 못해 그를 부추긴 어머니 레베카, 하느님의 축복을 업신여긴 형 에사우, 모두가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제 뜻대로만 행동할 때, 가정의 평화와 일치는 무너져버렸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머물며 준비하지 못한 자신에게서 오는 법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제 살길만 찾아 도망치던 야곱에게,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 약속하시며 ‘기다림’의 덕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창세 28,10-22). 이후로도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고 이용당하는 20년이란 세월 속에서, 하느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삶을 묵묵히 배워나갔지요. 마침내 야곱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는 온전히 자유로운 분임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분 안에서 깨어 준비하는 것임을 배웠고, 그렇게 더 이상 ‘뒷발꿈치 야곱’이 아닌 ‘성조 야곱’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기다림이 아닐까 합니다. 수동적이고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을 희망하길 지치지 않는 삶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알지는 못해도 그 ‘때’를 정해 두셨음을 믿기에, 나의 완성을 또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완성을 깨어 기다리며 부단히 준비하는 삶에 우리 구원의 길이 있겠지요.

 

마침내 야곱은 맏이가 아닌 넷째 유다에게 장자의 축복을 전하는 혜안을 지닌 성조가 되었고(창세 49,8-12), 바로 그 유다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도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하느님과의 만남의 ‘때’를 잘 기다리고 맞이하면서, 구원을 잉태하는 날들을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2021년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대구주보 3면,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야곱 I (창세 25,19-35,29)

 

 

야곱의 이름이 유래한 ‘발꿈치’(히브리어 ‘아켑’)란 단어는 메시아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창세 3,15)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야곱은 이름부터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셈이지요. ‘둘째 아들’ 야곱과 ‘둘째 (새) 아담’이신 예수님의 공통점 중 하나는, 두 분 모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극심한 고뇌에 휩싸인 밤에, 야곱은 뼈가 부러질 정도로 또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실 정도로 하느님께 매달려 기도했던 일(창세 32,23-33; 루카 22,39-46)이 아닐까 싶습니다.

 

야곱을 죽이려고 진작부터 마음먹었던(창세 27,41) 에사우가 거느린 장정 400명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려 메소포타미아의 임금들을 물리칠 때 거느렸던 장정 318명(14,14)보다도 많은 ‘병력’이었습니다. 임박한 죽음을 피해 재산과 가족을 이리저리 나누던 야곱을 두고(32,8-9.17-22; 33,1-2), 어찌 그저 간사하다 탓할 수 있을까요. 한 무리라도 살리려는 갈망의 표현이고, 가장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겠지요. 장애 없는 갈망은 없고, 갈망 없는 믿음이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극한의 두려움과 생에 대한 갈망 속에, 야곱은 오직 하느님께 매달립니다(32,10-13).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께서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시편 46,6)라는 시편 말씀처럼, 자주 성경은 밤을 기도의 때이며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간으로 묘사합니다. 야뽁 여울을 차마 건너지 못한 채 홀로 남아 죽음의 공포와 싸우던 야곱의 그 밤은(창세 32,23-33), 수난 직전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밤을 참 많이도 닮았지요. 가족과 무리 전체의 목숨을 짊어진 가장 야곱은 그렇게 하느님의 허리춤에 매달려 밤새도록 그분과 씨름하며 애원합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서 훔쳐낸 축복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에 의지하는 성조 야곱, 그가 진정 선택받은 자라면, 그것은 어느 누구보다 더 간절히 하느님께 선택받길 바랐기 때문일 터이지요.

 

씨름 중에 환도뼈를 치시고 동이 트니 놓으라 하시는 ‘반칙왕’(?) 하느님, 아마도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통설에 따라, 날이 밝아 야곱이 당신 얼굴을 보고 죽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겠지요. 그런 하느님의 염려와 배려까지도 넘어서서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매달리는 야곱의 모습은, 그깟(?) 환도뼈 하나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그분을 쉽게 놓아버리곤 하는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게 합니다. 환도뼈는 앞에 무언가를 잡아당길 때 쓰는, 허리 아래 넓적다리뼈라 하지요. 평생 상대방을 끌어당기며 제 입맛에 맞춰 살던 야곱이, 이제는 인생의 샅바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성조의 삶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결국, 그날 밤 씨름의 진정한 승자는 하느님이셨던 게지요.

 

이후, 야곱 가문은 낯선 신들과 장신구들(우상숭배의 흔적들)을 땅에 묻어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겼고(창세 35,1-4), 하느님은 그의 집안을 손수 돌보시며 이끄셨습니다(35,1-15; 46,1-4). 열심이 욕심으로, 열망이 욕망으로 틀어져 버린 ‘발꿈치’(25,26)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께 내 매일의 샅바를 맡겨드려 승리하는 ‘이스라엘’(32,29)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가 되길 빕니다. [2021년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대구주보 3면,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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