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르코 복음서 7장-----송영진 모세 신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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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5-01-22 | 조회수3,132 | 추천수0 |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마르코 복음서 7장>
7장
<1절-23절 :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1절..<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아마도 예수님에 대해 반감과 적대감을 품고 있는 갈릴래아 지역의 바리사이들이 예루살렘에 도 움을 요청했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고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언 행을 조사하려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내려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의 3장 22절 에서도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이 언급된 적이 있었습니다.
2절..<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 다.>--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사 전의 손 씻는 의식(정결 예식)은 위생상의 관습이 아니 라 종교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 의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학자들의 기준으로는 거 룩한 관습을 위반하는 중요한 범죄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모 두 식사 전의 손 씻는 의식을 무시했습니다(루카 11,38). 여기서 '더러운 손'이라는 말은 '부정한 손'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마르코는 구약성경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더러운 손'이란 '씻지 않은 손'이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3절..<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 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3절-4절은 이스라엘의 관습을 모르는 이방인 출신 독자들을 위해서 마르코가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을 설명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마르 코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들만 이 규정을 준수했고, 일반 백성들은 무시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모세오경에 기록된 것만을 지켰기 때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런 손 씻는 의식 등에 대한 바리사이 들의 생각에 반발했고 그들과 대립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상'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아니라 유명 한 랍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이란 랍비들의 전통으로서 '할라카'라고 부르던 '생활 행동지침'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이 지침을 따르지 않는 것 은 곧 종교적인 불경죄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원래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정결 예식은 사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일반인들의 사생활 에도 확대시켰고 그들 자신들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했느냐 하 면, '아키바'라는 랍비는 감옥에서 손 씻지 않고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는 쪽을 선택했다든 지, 또는 목말라 죽을 지경인데도 식사 전에 제공되는 한 모금의 물을 마시지 않고 손을 씻었다든지 등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한 움큼의 물로' 라는 말은 원문의 문장에는 '주먹으로' 라는 뜻의 단어로 되어 있어서 뜻이 불분명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아예 이 말을 빼버리고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4절..<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장터'는 죄인들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쉬운 곳이어서 부정을 탈 위험도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는 더욱 엄격한 정결 예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음식을 먹기 전에 몸을 씻을 때 대개는 팔꿈치까지 씻었 지만 엄격한 사람은 전신 목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물이 귀한 그 지역에서는 정결 예식 자체가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으로 그릇을 씻는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정을 탄 그릇을 씻는 규정은 나무 또는 쇠붙이로 된 그릇(잔, 단지, 놋그릇)으로 한정되었고, 부정을 탄 질그릇은 부수어버렸습니다. 이 구절에 '침상'이 언급되어 있는데, 공동번역 성 서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필사본의 차이입니다. 아마도 침상도 그릇과 같은 방식으로 씻 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들이 정해 놓은 이런 까다로운 규정에 대해 갈릴래아 지역의 일반 백성들은 대체로 무시하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결 예법을 어긴 것 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5절..<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 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들은 예수님께 '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냐?' 라고 묻지 않고 '왜 조상들 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 의 핵심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 씻는 의식을 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개별적인 규정 위반 사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질문을 한 것입니다.
6절-7절..(6)<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 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 게서 멀리 떠나 있다.> (7)<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 다.'>--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29장 13절을 인용해서 답변하시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 자들이 위선자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을 겉으 로만(형식적으로만) 섬기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인간의 규칙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따라서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일 은 관습일 뿐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8절..<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은 앞의 내용과 연결되는 구절이 아니라 뒤의 내용과 연결되는 구절입니다. 즉 이 구절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새로운 비판인데, 그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하느님의 계 명을 버리고(제대로 안 지키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9절-13절에서 전통 때 문에 계명을 지키지 않는 행동의 구체적인 예를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키는 것이다.' 라는 번역보다는 '지키고 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하느 님의 계명'과 비교할 때 사람의 전통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만일에 사람의 전통 때 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그 전통이라는 것을 없애야 합니다.
9절..<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9절은 8절의 말씀을 반복한 것인데, 좀 더 강하게 꾸짖는 말투로 하시 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잘도' 라고 번역된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교묘하게' 라고 번역했 는데, 원문 단어는 '훌륭하게, 옳게, 아름답게, 적절하게'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여 기서 이 말은 반어법적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사람의 전통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 는 행동에 대해서 야유하는 것입니다.
10절..<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 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라는 계명은 십계명 중 제4계명입니다(탈출 20,12).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라 는 율법은 탈출기 21장 17절에 있는 율법입니다. 이 계명과 율법을 모세가 말했다고 표 현되어 있는데 모세가 정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셔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 하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이고, 하느님의 율법입니다.
11절..<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이 인간의 전통에 집착해서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구체적인 예로 '코르반' 관행을 들 고 있습니다. '코르반'은 히브리어로서 11절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제가 드릴 것은 하느 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민수기 30장 3절이 이 관습의 근거가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어떤 물품을 하느님께 바쳐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서 약문입니다. 코르반으로 선언된 물품은 하느님에게 속한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사용하거나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서약은 강제로 된 것이 아니라 면 어떤 권위자도 그 서약을 풀 수 없었습니다.
12절..<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코르반 으로 선언된 물품을 실제로 성전에 바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흔히 부모 봉양을 회피하 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습니다. 부모와 사이가 나쁜 자식들이 코르반 서약문을 악용해 서 부모 봉양을 저버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를 핑계로 인륜을 짓밟 는 짓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사실은 누 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지 않은 것입니다.
13절..<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은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또 불효자 식은 사형에 처하라는 것도 하느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도 코르반 관행을 남용하고, 악 용하는 것은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짓이고, 하느님을 핑계로 하느님 의 뜻을 거스르는 짓입니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라는 말은 코르반 서약문 외에도 전통을 핑계로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일이 많다는 뜻인데, 그게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전반적으로 비판하시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인간에 대한 봉사와 사랑보다 우위에 두었고, 그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을 섬기는 일과 인간에 대한 봉사와 사랑을 하나로 생각하셨고,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그 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이라는 기준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부 모와 가족과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이 바로 너희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인데, 그런 너희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떻게 내 제자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은 예수님의 말씀에 한마디 말도 못하고 물러나고 맙니다.
14절..<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아마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 고 그냥 떠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떠나간 뒤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불러 모으시고 당신 의 말씀을 새겨들으라고 당부하시는데, 사람의 전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앞의 2절-5절 에서 제기되었던 '깨끗함'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5절..<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 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이 구절의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사람을 깨끗하게 하거나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외부에 있는 물질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 의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을 포함해서 사람 외부 의 모든 물질을 뜻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사람의 생각, 말, 의지, 마음, 행동 등을 모두 뜻합니다. 여기서 '더럽히다.' 라는 말에는 '부정하게 하다.' 라는 뜻과 '죄를 짓 게 한다.' 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뒤의 18절-23절의 말씀은 음식에 관한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는 일종 의 폭탄선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있는 음식에 관한 율 법을 비롯해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 관한 율법을 사실상 폐기하신 것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6장 18절-31절에 돼지고기를 먹기보다는 죽음을 택한 엘아자르의 순교 이야기가 나 오고, 사도행전 10장 14절에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라는 베드로의 말이 나옵니다. 그만큼 부정한 식품을 피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의 핵심이 되어 있었고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음식에 관한 율법 뿐만 아니라 모든 정결 예식이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깨끗함과 더러 움'에 관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배격하시고,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십니다.
(16절..<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일부 필사본에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라는 16절이 있는데, 대부분의 필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고, 그냥 17절로 건너뛰 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성경 본문에서는 제외되어 있는데, 아주 무시할 수는 없기 때 문에 공동번역 성서나 새번역 성경 모두 이 구절을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7절..<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여기 서 말하는 '집'이 어디에 있는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앞의 2절에서 제자들과 함 께 식사를 하고 있었던 그 집일 것입니다. 어떻든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라는 말 은 '다른 사람들은 없고 예수님과 제자들만 남게 되었을 때'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 기들과 예수님만 남게 되자 앞의 15절의 예수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제자 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유'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도 잘 이해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음식 규정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 은 훨씬 뒤의 일입니다. 그들도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라는 종교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8절-19절..(18)<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 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 냐?> (19)<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 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꾸짖으 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낸지도 꽤 오래 되었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다시 설명하십니다. 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음식은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음식 때 문에 사람이 더럽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음식은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소화되어서 뒷간으로 갈 뿐입니다. 그러니 음식 자체에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도 없 습니다.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에 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율법학자들은(또는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더러움과 율법상의 더 러움과 윤리적인 더러움(죄)을 구별하지 못했고, 사소한 규정들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 면서 '참된 깨끗함'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 히신 것이다.' 라는 구절은 마르코가 덧붙인 설명입니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음식 규정 들을 예수님께서 폐기 처분하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때에 그렇게 세세하게 부정한 음식을 구분하고, 정결 예식을 강조한 것은 그렇 게 해야만 할 그 시대의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간에 구약시대 때에는 거룩하신 하 느님을 섬기려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항상 자기 자신을 정결하고 거룩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 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온갖 세세한 규정들이 사람의 삶을 지 배하기 시작했고, 규정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무엇이 하 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일인지, 왜 그런 규정들을 지켜야 했는지를 잊어버릴 정도가 되 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20절..<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사람에 게서 나오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윤리적 악은 마음에 서 나오고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을 죄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은 원래 악하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깨끗해질 수 있고, 또 깨끗한 마음이 우리를 깨 끗하게 합니다. 그러나 깨끗한 마음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더럽혀질 수 있고, 더럽혀진 마음 때문에 더러운 말과 더러운 행동을 하게 되고 그것이 사람을 더 럽히게 됩니다.
21절-22절..(21)<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여기에 나오는 악행의 목록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일부만 언급한 것인데, 당시에 두드러지게 사람들을 괴롭히던 죄들입니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라는 말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즉 사 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죄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나쁜 생각 들'이라는 말은 '죄들'이라는 뜻으로서 목록에 열거되어 있는 모든 죄들을 종합적으로 가 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륜'으로 번역한 말은 '음행'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모든 음란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방탕'은 나쁜 마음이 나쁜 행동으로 이어진 죄들입니다. '악의, 시기, 교만, 어리석음'은 나쁜 마음이 나 쁜 생각으로 이어져서 생각으로 짓는 죄들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은 종교적인 무관심 때문에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일, 또는 하느님의 뜻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데, 바로 그 '무관심'이 죄가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리석음'도 죄라는 것입니다. '사기, 중상'은 나쁜 마음이 나쁜 말로 이어진 죄들입니다. 즉 말로 짓는 죄들입니다.
23절..<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이 구절은 앞의 15절에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한 것입니다. 물로 손을 씻는다든지, 어떤 음식을 피한다든지, 그런 형식적인 깨끗함은 중요하지 않고, 참으로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 입니다. 껍데기가 아니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24절-30절 :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예수님은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드문 일이기 는 했지만 가끔은 이방지역으로 가신 때도 있고, 이방인을 상대하신 때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에 폐쇄적이었던 본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활 동하셨다는 사실을 내세워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이방인을 대 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개방적이었던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몇 차례 이방인들을 고쳐주신 기적들, 즉 게라사의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5,1-20),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딸을 고쳐주신 일(7,24-30),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신 일(마태 8,5-13) 등을 예 로 들면서 이방인 전도를 옹호했습니다.
24절..<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그곳을 떠나' 라는 말에서 '그곳'은 아마도 '겐네사렛'일 것입니다(6,53). '티로'는 갈릴래아 지방 북쪽의 지중해변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어떤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 티로에 가신 이유는 군중을 피해 조용히 계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자 교육이나 또는 휴식 등의 이유로 사람들을 피해 조용히 계시려고 이방지역의 어떤 집 에서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아무도 모르게 계시려고 했으나) 그곳에 서도 예수님의 소문이 퍼졌고, 그래서 조용히 계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25절..<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예수님의 소문'이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일 것입니다. 그런 소문을 듣고 '더러운 영(악령)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행동이고, 동시에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 이기도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25절과 26절에서는 '부인'이라고 번역하고, 27절에서부터 30절까지는 그 여자' 라고 번역했는데, 이렇게 번역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계속 '부인' 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계속 '그 여자' 라고 일관성 있게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26절..<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여기서 '이교도' 라는 말은 그 여자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인이며, 하느님을 안 믿는 다른 종교 사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시리아 페니키아'는 티 로 주변 지역입니다. 그 여자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말도 이방인이라는 것을 나 타내는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교양 있는 상류층 여자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종교 와 문화가 전혀 다른 그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 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 여자의 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 여자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 라고 예수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27절..<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자녀들'은 이스라엘 사람 들, 또는 아브라함의 자녀들, 또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배불리 먹는다.' 라는 말은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라는 말은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강아지'는 유대 인이 아닌 이방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르면서 멸시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느님 도 모르고 하느님을 섬기지도 않는 것을 멸시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개' 라는 표현은 들에서 떠돌아다니는 '들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 신 '강아지' 라는 표현은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사는 애완견을 가리킵니다. 이방인을 가리 키는 말로서 뜻에는 차이가 없지만 멸시의 말투는 많이 완화된 것입니다. 옆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여인과 함께 가실 것이라고 예상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시면서 여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완전한 거절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몰라서 시험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수준의 믿음을 갖도록 시련을 주셨다는 뜻에서의 시험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의 순서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먹이고, 그 다음에 강아지를 먹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구원은(또는 복음 선포 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주어져야 하고, 그 다음에야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민족 차별이 아니라 구원사업의 순서를 말한 것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개인적인 사명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10장 6절에도 제자들에게 '이스 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복음을 듣는 특권을 가졌던 이스라엘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스스 로 구원의 길에서 탈락했습니다. 그 다음에 복음을 듣게 된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 습니다. 이스라엘의 특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한정된 것일 뿐입니다. (그래도 상대방을 향해서 직접 '강아지'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좀 너무한다 싶은 느 낌이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개', 또는 '강아지' 라는 표현은 하느님을 안 믿는 이방인 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도 여인의 믿음이 많이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 에서 단순히 딸의 치유만을 바라고 있음을 꿰뚫어보시고 그런 표현을 사용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말씀 은, '너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느냐? 하느님의 은총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도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마태오복음 7장 6절에서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라고 말씀하신 적 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강아지’ 라는 표현은 여인으로 하여금 올바른 믿음을 갖 게 하기 위한 충격 요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절..<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 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지금 그 여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했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은 '키리에' - '주님'입니다.) 그 여자 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냉정하게 거절하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 여 자가 예수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다면, 또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여자는 '강아지'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고, 예수님의 태도와 답변에 실망해서 그냥 떠났 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매달립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라는 말은 그 여자가 자기는 아직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하 는 말로 해석됩니다. 즉 자기가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는 자 기는 아직 이교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여자의 '그러나 상 아 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내가 아직 강 아지 수준의 이교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하느님 은총의 부스러기 정도는 얻어먹 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또는 '아직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 사업 의 순서가 되지 않았더라도, 이방인들도 은총의 부스러기 정도는 미리 얻어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들이 '상 아래에' 있다는 표현과 자식들이 빵을 먹다가 부스러기를 '떨어뜨린다.' 라는 표현에는 별로 중요한 뜻은 없는 것 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특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이방인에게도 은총이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여자가 바라는 것은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누렸던 특권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28절은 그 여자의 믿음, 겸손, 끈기를 나타냅니다. 기도는 바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고, 거절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포기하지 말아 야 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9절..<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그 여자는 이교도였으니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아직은 불 완전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겸손한 자세는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라는 말은 그 여자의 믿음과 겸손을 인정하신다는 뜻의 말입니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간청을 들어주셔서 마귀를 쫓아냈으니 이제 돌 아가도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어떻게 마귀를 쫓아내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치유는 '원격치유'입니다. 즉 직접 가시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 것인 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우리 도 예수님을 직접 뵙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고 있습 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이방인 여자와 같은 '믿음과 끈기와 겸손'입니다.
30절..<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그 여자는 집에 가서 예수님 말씀대로 마귀가 나가고 딸이 치유되었음을 확인합니다. 믿음의 응답을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침상에'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자리 에' 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은 '침대'나 '침상'으로 번역해야 할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여 자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31절-37절 :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31절..<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시돈'은 티로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이고, 데카폴리 스 지역은 요르단 강 동쪽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한동안 이방인 지역 을 돌아다니셨음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단순히 병을 고치 는 분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서 좀 떨어져 있고 싶었 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라는 말은 좀 막연한 표현 입니다. 호수 주변 어느 지역으로 가셨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200주년 성서는 '갈릴래 아 호수로, 데카폴리스 지방 한가운데로 가셨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번역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이방인 지역에 계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귀먹고 말 더듬는 이'와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데, 이것도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32절..<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귀먹고 말 더듬는 이'란 '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사람', 즉 이중 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흔히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도 잘 못하게 됩니다. 장 애자를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그에게 안수를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그의 장애를 고쳐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33절..<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다 는 것은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은 자비와 사랑 때문이지 군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몇 명의 제자만 입회시키거나(5,37), 병자만 따로 데리고 가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8,23).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장애자를 분리해서 사람들이 없 는 곳으로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님의 여러 가지 치유동작은 당시의 기적 이야기에 서 흔히 나오는 치유 행동입니다.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신 것은 그의 귀가 고장 났 기 때문에 고장 난 것을 고치기 위한 동작입니다. '침'은 고대에는 약으로 생각되기도 했 습니다.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는 것도 그의 혀가 고장 났기 때문에 고장 난 부분을 고친다는 뜻의 동작입니다.
34절..<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하늘을 우러러'는 하늘의 기운을 얻기 위한 동작입니다. '한숨'을 내쉬시 는 것은 하늘의 기운으로 병마를 물리치는 동작입니다. '에파타' 라는 말은 아람어로 추정 됩니다. 마르코는 아람어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이 말이 '열려라.' 라는 뜻이라고 설 명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에파타' 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 장애자의 귀와 입을 향해서 하신 명령이 아니라, 장애자 자신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유는 의사 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환자의 인격 전체, 영혼까지 치유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이나 안수 한 번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당 시 주술사들이 병을 고칠 때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여러 가지 동작을 하시는 것은 그 장애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로 해석됩니다. 그 장애자는 귀가 멀었기 때문에 예 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아직 아무런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믿음을 갖게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숙한 의식과 동작으로 믿음을 갖게 하고, 그의 영혼 을 준비시킨 것입니다. 여기서도 물론 치유의 기적은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이루어집 니다. 여러 가지 의식과 동작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고, 병자에게 믿음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동작과 의식은 당시의 의사들이나 주술사들이 행하던 주 술적인 치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35절..<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곧 바로' 라는 말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라는 말은 그가 정상적으로 듣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혀가 풀려서' 라는 말은 그의 혀가 병마에서 풀려났다는 표현입니다.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라는 말은 그 장애자가 말 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 불완전했었는데, 이제는 말을 '제대로' 완 전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어서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청각 장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천주교의 엄숙한 전례의식이나 성당 건물, 여러 가지 성상, 성화 등이 믿음을 갖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믿음을 갖고 있고 복음을 알아들어도 그것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 또는 전하지 않으 면 벙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들 중에도 그런 '귀먹은 반벙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체적으로는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장애자이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복 음을 훨씬 더 잘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36절..<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 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도 그랬던 것 처럼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침묵 명령은 장애자와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문을 널리 퍼뜨립니다. 장애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증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 역시 이 놀라운 기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이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람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 데, 치유 받은 병자들 입장에서는 그 기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 을 것입니다. 본당마다 목표를 정하고, 과제를 주고, 시상식을 하면서 선교운동을 하는 모 습이 과연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올바른 태도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넘쳐나 는 기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어떤 목표 달성을 위해서, 또는 과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 기쁨이 없는 채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복음 선포가 아닙니다.)
37절..<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 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경탄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라고 번역했고, 200주 년 성서는 '그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 라고 번역했는데, 200주년 성서의 번역이 원 문에 제일 가깝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 다.' 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으로서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라는 사상이 들어 있는 말로 해석합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라는 말 은 이사야서 35장 5절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예수님은 구원을 이룩하는 메시 아' 라는 사상이 들어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
<묵상> "에파타 = 열려라 = 열어라"
예수님은 병자의 닫힌 귀와 입을 치유하기 위해서 "열려라." 라고 명령하셨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뉴스들에만 귀를 기울이고 주변의 힘없는 사람들의 절규는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열어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마음들이 닫혀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바라보느라고 모두에게 중요한 것,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못보고,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만 듣느라고 정말 들어야 할 말에는 귀가 닫혀 있습니다. 허무한 말장난을 즐기느라고 정말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입이 닫혀 있습니다.
"열어라!"
예수님의 말씀이 천둥으로, 벼락으로 떨어집니다. "열어라!"
2006. 7. 15. 송영진 모세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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