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인 베로이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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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9-10 | 조회수3,000 | 추천수0 | |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인 베로이아
- 오늘날의 베로이아 전경(BiblePlace.com).
바오로는 테살로니카에서 말씀을 선포하여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이루지만, 유다인들의 시기와 박해로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자 테살로니카 공동체는 밤중에 바오로와 실라스를 베로이아로 떠나보냅니다(사도 17,10).
테살로니카에서 서쪽으로 70여km 떨어진 베로이아는 기원전 10세기에 이미 주민들이 살았던 오래된 도시입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B.C.356~B.C.323)의 탄생지이자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펠라에 이어 마케도니아의 두 번째 도시로 번성합니다.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로마 제국에 병합된 후 베로이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재하는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합니다. 도시에는 유다인 주거 지역이 있었고 따라서 회당도 있었습니다.
많은 유다인과 지체 높은 그리스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다
테살로니카의 형제들이 바오로와 실라스와 티모테오를 베로이아로 떠나보냈을 때는 이런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로이아에 도착한 바오로는 바로 유다인 회당으로 갑니다. 여느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먼저 유다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베로이아 고대 도시 벽(BiblePlace.com).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기존 사고방식이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바오로가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오로를 시기한 나머지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도시를 혼란에 빠뜨리는 바람에 결국 바오로가 테살로니카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로이아의 유다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바오로가 전하는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성경(구약)의 내용과 부합하는지 열심히 검토하고 연구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는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사도 17,11)라고 전합니다.
그 결과 베로이아의 유다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됐을 뿐 아니라 지체 높은 그리스인들 가운데서도 믿게 된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사도 17,12). 이 또한 바오로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과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있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하고 설파했지만 불과 몇 사람만이 감복해서 따른 것과(사도 17,2-4) 아주 대비됩니다.
박해를 피해 아테네로 떠나다
그런데 베로이아에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바오로가 베로이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소식을 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이 베로이아까지 와서 군중을 선동하고 자극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로이아의 형제들은 곧바로 바오로를 피신시켜 바닷가로 가게 합니다. 그러나 실라스와 티모테오는 그곳에 남습니다(사도 17,13-14).
바오로는 피신시키고 실라스와 티모테오 두 사람은 남게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우선 베로이아까지 쫓아온 유다인들의 주 표적이 실라스나 티모테오가 아니라 바오로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로이아의 형제들이 바오로에게서 미쳐 다 듣지 못한 말씀을 두 사람을 통해서라도 더 듣고 싶어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를 바닷가로 데려간 이들은 아테네까지 바오로를 안내한 후 되도록 빨리 자기에게 오도록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바오로의 전갈을 가지고 베로이아로 돌아옵니다(사도 17,15). 베로이아에서 아테네까지는 500km가 넘습니다. 더욱이 바오로에게는 그동안 함께 지냈던 실라스와 티모테오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베로이아의 형제들은 안내인들에게 아테네까지 바오로를 안내하라는 배려를 했고, 바오로는 이 안내원들을 통해 빨리 자기에게 오라는 전갈을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보낸 것입니다.
- 베로이아에 있는 고대 로마 도시들의 동서를 잇는 거리 데쿠마누스(좌), 베로이아에 있는 유대인 구역 입구. 기원전 3세기부터 북 그리스에는 유대인이 있었다.(우)(BiblePlace.com)
바오로는 왜 계속 박해받나
여기서 바오로에 대한 유다인들의 계속되는 박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살기를 내뿜으며 ‘새로운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사도 9.1-2), 곧 바오로는 회심한 이후에 반대로 복음을 전하면서 계속 박해를 받습니다. 자신이 회심한 도시 다마스쿠스(사도 9,23-24)와 예루살렘에서(사도 9,29)에서뿐 아니라 제1차 선교 여행 때는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 즉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사도 13,50), 이코니온(사도 14,5) 리스트라(사도 14,19) 등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2차 선교 여행 때는 유럽 땅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와 테살로니카에 이어 베로이아에서도 박해를 받습니다. 바오로를 박해한 이들은 필리피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다인이었습니다. 한때 유다인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에서 동족인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바오로에 대한 거듭된 박해는 바오로의 회심 때에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바오로)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사도 9,15-16) 그렇다면 바오로가 겪은 박해는 바로 주님의 예고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바오로의 선교활동이 바로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처럼 말입니다(사도 13, 2.3; 15,40; 16,6-10 참조), 바오로는 나중에 에페소 원로들에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사도 20, 23)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 베로이아에 있는 바오로의 베로이아 연설 모자이크화(BiblePlace.com).
성경의 도시임을 알려주는 바오로 모자이크화
바오로의 선교활동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된 베로이아는 일찍이 테살로니카 관구 관하의 교구로 됩니다. 바오로가 ‘옥중에서 얻은 아들’이라고 부른 오네시모스(필레 1.10)가 베로이아의 초대 주교였다는 전승도 전해옵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282~1328) 때는 대교구로 승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베로이아에서는 바오로 사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로마 시대의 광장 터와 일부 도로 터, 그리고 비잔틴 시대의 성벽 일부 등 옛 흔적이 조금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도시 남쪽에는 바오로 사도가 베로이아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을 표현한 모자이크화가 도시 옛 유다인 회당 계단 자리로 전해지는 곳에 설치돼 있어 베로이아를 찾는 이들에게 이곳이 바오로 사도가 말씀을 전한 성경의 도시임을 알려줍니다.
베로이아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의 열정과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열심히 연구하는 유다인들의 열린 마음을 배우게 해주는 성경의 도시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9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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