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안젤름 그륀 신부님과 시편77장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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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혁준 | 작성일2015-03-10 | 조회수1,599 | 추천수0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내게 귀를 기울이시라고 나 소리높여 하느님께, 나 소리높여 하느님께 부르짖네. 곤경의 날에 내가 주님을 찾네. 밤에도 내 손을 벌리지만 지칠 줄 모르고 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하느님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 얼이 아뜩해지네. (시편7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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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위로도 마다하네. 하느님을 생각하니 즐거워 지네. 내가 말하니 내 얼이 아뜩해지네. (그륀 신부님의 저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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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부터 (시편 77,2-4)이 공감이 가고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하느님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거듭할수록 내 얼이 아뜩해 진다는 4절 말씀이 신기하리 만큼 저의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는것 같은 구절 이었습니다. 저는 시편 저자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과정에서 혼란과 고통을 호소하는 표현으로 '한숨'과 '얼이 아뜩하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우리와 가깝고도 머나먼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젤름 그륀 신부님은 하느님을 생각하니 한숨 대신 즐거워 진다고, 그분의 대한 생각이 아니라 내가 말하니 내 얼이 아뜩해지네. 라고 말씀하십니다.
<4세기 이집트 수도승 '에바그리우스'의 '악한생각 대처법'을 21세기 독일 수도승 안젤름 그륀이 오늘날의 언어로 풀어 쓰다.>는 내용의 <내 영혼의 치유제>라는 저서에서 그리 표현 하십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버리면 쉽게 받아 들이겠지만, 조금 의문이 들어서요. 왜 굳이 성경을 180도 다른 표현을 쓰심으로서 다르게 해석 하신건지 궁금합니다.
도움 주실수 있는분께 도움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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