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iblicum.or.kr/bbs/board.php?bo_table=QnA&wr_id=953&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7%88%ED%88%AC%ED%95%98%EB%8A%94+%ED%95%98%EB%8A%90%EB%8B%98&sop=and
질투하는”(???)은 원래 ‘불’이나 ‘열기’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한 낱말로 “불타는”, “열렬한”, “열정적인”으로 옮길 수 있다. 곧 사랑, 염원, 분노 등으로 가득 찬 감정을 뜻한다. 이 단어는 오직 하느님을 묘사할 때만 사용된다.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우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자주 ‘결혼’의 비유로 표시되었다. 곧 이스라엘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남편으로 둔 아내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아내는 자주 하느님을 배신하였고, 그 때마다 하느님은 ‘질투’의 감정을 드러내신다(호세 1-3; 예레 2,2.23-25.32; 3,1-13.20; 이사 50,1; 54,4-7; 62,4-5; 애가 1,1-2,19).
곧 ‘질투’는 하느님과 백성의 배타적이고 끈끈한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며, 하느님 백성은 오직 한 분께만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한다는(6,4-5) 신학을 표현하는 용어다. 그러므로 ‘질투’는 무한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전제하는 것이다.
신명기는 ‘질투하는 하느님’의 진면목은 ‘대자대비하신 분’이라고 4장에서 이미 설명했다(4,24.31을 보라).
이렇듯 하느님은 질투의 감정을 미리 살짝 알려주시어, 아끼는 아내 이스라엘의 사랑을 얻고 싶은 신랑의 감정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오리게네스). 그 분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열정’(요한 2,17)으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도(마태 21,12-13)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집(성전)이요, 교회가 하느님 백성이니,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물려받으신 사랑을 드러내신 것이다(오리게네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