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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요한 묵시록: 상징의 세계, 마지막 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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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30 조회수2,642 추천수0

[구역반장 월례연수] 요한 묵시록


상징의 세계, 마지막 날 이야기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여러 상징(천체와 우주, 동물, 인간, 색, 숫자 등)과 환시들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두려운 종말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가까이하기에 편치 않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묵시록의 복잡한 상징들을 하나하나 모두 다 이해하려는 분들이나, 개별적 단어나 문장에만 집중해서 그 의미를 오해하거나 과도한 두려움을 느끼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은 저술되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두려움과 공포의 성경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인에게는 희망의 소식이었고, 용기를 불러 일으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자

 

묵시록 저자의 이름은 분명하게 ‘요한’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저자 요한(1,1.4.9; 22,8-9)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사도로 소개하거나 신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2세기부터 사도 요한이 복음과 서간 그리고 요한 묵시록을 함께 저술했다고 여기고, 복음・서간・묵시록을 함께 묶어 ‘요한계 문헌’이라고 불러왔습니다. 2세기 말과 3세기 초엽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이레네오, 무라토리 정경, 테르툴리아누스, 히폴리투스 등도 같은 견해를 유지하였으며, 오리게네스는 사도 요한이 넷째 복음서와 묵시록을 함께 저술했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복음과 서간, 묵시록의 저자가 같다는 또 다른 근거는 중요 주제들이 동일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셋 다 그리스도를 ‘생명의 물’(요한 4; 묵시 7,17; 22,1-17), ‘말씀’(요한 1,1; 묵시 19,13), ‘어린양’(요한 1,29.36; 묵시 5,6-8)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묵시록에 사용된 그리스어 표현과 문체, 또 구체적 가르침의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학자들은 묵시록의 저자가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간을 쓴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 하여도 요한계 문헌들이 사도 요한과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요한의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다른 요한계 문헌들과의 상호 비교는 요한 묵시록을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집필 연대

 

저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의 박해 시기에 밀레토스 남서쪽, 에게해의 작은 섬 파트모스에 갇혀 있을 때 이 책을 썼다고 언급합니다(묵시 1,9 참조). 리옹의 이레네오는 사도 요한이 기원후 96년에 암살당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년에 묵시록을 썼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도미티아누스 통치 14년, 즉, 94-95년경에 묵시록을 집필하였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집필 배경

 

묵시록이 작성된 시기에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본인을 ‘주님이자 신’으로 부르고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며 황제의 명을 어길 것인가, 아니면 우상 숭배를 할 것인가. 이로 인해 교회 공동체는 당연히 로마로부터 모진 박해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묵시록의 ‘순교’는 완전한 ‘증언의 순간’이 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 승리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 다시 오실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묵시록은 이 순교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북돋우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의 위협적인 말씀들은 오히려 로마 제국의 박해와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며, 따라서 묵시록은 신앙 고백임과 동시에 희망을 선포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구조와 내용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도 오실 분”(1,4)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인 요한 묵시록은 기본적으로 묵시문학의 방식과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묵시 문학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은 묵시문학보다는 예언자들의 일반적 설교에 더 가깝고, 역사를 신앙의 관점에 따라 설명하기에 다른 묵시문학적 작품과는 구별됩니다.

 

편지 형태의 예언 후에는 여러 ‘환시’들이 이어집니다. 첫째 환시(4,1-11)는 일곱 봉인과 일곱 나팔로 이루어지며, 세상 종말의 전조의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둘째 환시들(12,1-22,5)은 교회가 겪게 되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시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12장은 교회와 적들 사이에 일어나는 투쟁의 마지막 근원을 묘사합니다. 태양을 입은 여인이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하느님의 어좌가 있는 하늘로 올려졌는데, 이 여인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모인 교회의 어머니라는 이중적 실재를 포함합니다. 교회는 어린양이 함께하시며, 구원받는 이들은 이 어린양을 뒤따르게 됩니다. 일곱 대접과 그리스도의 승리(15,5-20,15)를 통해 완전수 7에 대한 도식이 이어집니다. 바빌론 패망을 통해 승리자로 선포된 분을 이야기하며, 신부인 교회는 어린양과 영원한 혼인식을 올릴 것입니다(19,1-16). 첫 번째 부활은 세례와 은총으로 이루어진 영적 부활이고, 두 번째 부활은 세상 종말에 있을 육신의 부활을 가리키며, 이날은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받는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 사람들은 천상 예루살렘(21,1-22,5)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여정의 목적지입니다. 맺음말(22,6-21)은 전체를 종합하며, 예수님이 바로 이 묵시의 기원이심을 선포합니다(22,16). 교회는 이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이며, 예수님께서 바로 이 성취를 이루어주실 것으로 묵시록은 끝이 납니다.

 

 

묵시록의 상징

 

묵시록에는 여러 상징이 등장합니다. 이 상징들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 특히 심판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며, 구약의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서 언급되었던 상징들이 다시금 묵시록에서 반복되어 그 의미를 차용하거나 혹은 새로운 의미를 담아 사용됩니다. 여러 상징 중 숫자와 관련된 상징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 숫자 7 : 묵시록의 수신인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1,4.11; 2-3). ‘일곱’은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숫자로, 완전수 중의 하나입니다. 한 주간을 일주일(7일)로 지내는 것처럼 7이라는 숫자도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일곱 교회 공동체에 묵시록을 썼지만, 이러한 의미로 묵시록은 일곱 교회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전 교회를 대상으로 기술한 것이 됩니다.

 

• 숫자 12 : 성경에서 ‘열둘’ 또한 완전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열둘이며, 예수님의 제자들도 열둘입니다. 열둘은 완전한 숫자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묵시록의 천상 예루살렘에서 열두 성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습니다(21,12).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21,14).

 

• 숫자 144,000 : 십사만 사천(7,4-8; 14,1-3)은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완전수 12를 두 번 곱한 것에 1,000을 곱한 숫자로(12×12×1,000) 이스라엘의 완전함, 새로운 도성 예루살렘의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나타내는 숫자로 표현됩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를 의미합니다. 144,000는 한정적인 구원의 숫자라기보다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숫자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 숫자 666 :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숫자입니다. 이를 악마의 숫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기 전에는 문자로 숫자를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단어나 이름을 쓸 경우에도, 각각의 문자가 숫자를 나타내었고, 이에 해당되는 숫자들을 다 더해서 그 단어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666을 여기에 적용해 보면 네로 황제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네로 황제를 의미하는 라틴어 ‘Nero Caesar’를 그리스어로 음역하면 ‘Nerōn Kaisar’가 되고, 이것을 당시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로 음역하면 ‘קסר נרון‘가 되는데, 각각의 아람어에 해당하는 숫자를 모두 더하면 그 값이 666이 됩니다. 네로 황제의 모진 탄압을 생각해 보면 이 연결고리를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666이 근본적으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인 7에서 하나씩 모자란 조합이고, 이 불완전함이 세 번이나 모여 있기에, 불완전함을 강조한 상징의 숫자라고도 설명합니다.

 

 

희망의 책, 요한 묵시록

 

요한 묵시록은 언제까지나 신앙과 그 희망을 반복해서 일깨우며, 사랑의 메시지이자 신뢰의 메시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불확실한 미래와 현세의 불안감 속에서 순간적 도피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구약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위로하고 그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인도합니다. 따라서 묵시록은 단순한 향수나 현실 망각이 아니라, 영원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그 신비를 바라보게 하고, 그 여정에 동참하게 하는 책입니다.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이자, 신앙과 삶의 실제화를 위한 부르심인 묵시록의 말씀들이 위로와 희망, 믿음의 메시지로 선포되기를 청해 봅니다.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4PdjGcEfUVg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1년 11월호, 최광희 신부(성 앵베르 센터 부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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