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이름 속에 담긴 비밀 / 송용민 신부님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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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5-06-17 | 조회수1,832 | 추천수1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세상 속 신앙 읽기 5
하느님의 이름 속에 담긴 비밀
나는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는 편에 속한다. 함께 사는 신학생들의 이름도 가끔은 떠오르지 않거나 헷갈려서 낭패를 보는 적이 있다. 어쩌다 반갑게 인사하는 신자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색한 대화를 해야 했던 경우도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주는 동시에, 그 사람과의 만남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떠오르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담고 있어서, 사람의 이름과 떠오른 기억들을 잘못 맞췄을 때 당하게 되는 당혹감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분명히 사람들은 하느님을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신(神), 주(主)님, 야훼, 초월자, 절대자, 알라, 심지어 같은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이 모두가 같은 하느님의 다른 이름일까? 아니면 하느님을 생각하고 느껴온 인간들의 체험이 녹아 있는 다양한 호칭은 아닐까?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 얼이 아뜩해지네”(시편 77, 4). ‘아뜩하다’란 “갑자기 어지러워 정신을 잃고 까무러칠 듯하다”란 말이다. 하느님의 이름 앞에 서서 까무러칠 듯한 체험이란 어떤 것일까?
하느님은 모세의 질문에 ‘나는 있는 나다’(탈출 3, 14)란 다소 당혹스런 대답으로 많은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을 상념에 빠지게 하셨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은 그 분 앞에서 정신이 아뜩해지는 체험 없이는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싯구처럼, 하느님 앞에서 그 분을 진정으로 하느님으로 부를 수 있는 체험을 가진 사람에게만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 주실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느님’의 이름에는 비밀이 담겨 있다. 그 비밀이란 그 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감싸고 있는 신비이다. 우리는 어두운 우리의 현실 속에 파묻혀 있는 나와 이런 나를 어둠 속에 놓아두지 않는 그 어떤 힘을 본능처럼 느낀다. 정신없이 하루를 살다가도 문득 내가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살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내팽개쳐진 자아를 휘감고 있는 어두움을 발견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현실이 전부는 아닐 것이란 알 수 없는 내면 깊은 곳의 외침도 듣는다. 사실 우리에게는 죽음의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암 말기 환자들의 마음에도, 언제 불려갈지 모르는 죽음의 문턱에서 사는 사형수들에게 허락된 하루의 삶에도 죽음을 넘어서려는 우리네 희망의 본능을 발견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하느님의 이름 속에는 우리의 희망이 담겨 있다. 여기에 비밀이 담겨 있다. 나약하고 버림받고 죽음으로 끝내야 하는 우리 인생 속에는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있다. 남을 아프게 하고, 상처 주며 무자비하게 살아온 내 삶 속에서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바라본다. 세상사에서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력감과 상실감, 불의와 폭력으로 울부짖는 세상의 모순 속에서 전지전능하시고 공평하신 하느님을 찾는다. 속되기 짝이 없는 세상살이 속에서도 아름답고 순결하며 가슴 벅찬 눈물을 맺게 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신비이신 하느님을 기대한다.
우리의 희망이 하느님의 이름을 만든다. 우리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찾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다양한 이름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하느님의 이름이 담고 있는 비밀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 그래서 우리의 절대적 충성과 그 분의 신뢰를 희망하는 ‘하나님’이 계신다. 세상 어디에도 차별 없이 공평하시며 모두를 감싸주시는 하늘과 같은 높고 넓은 ‘하느님’이 계시다.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신비와 무한한 우주를 감싸고 있는 창조주, 존재의 근원, 신비 자체이신 분, 너무 위대해서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도 계시다.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셨다.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은 이름이 없으시다. 그 분은 우리의 바람과 희망에 담아둘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시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아직은 내가 삶의 질곡에 갇혀 있다는 증거이다. 만일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다면, 그 때는 그 분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으리라. 그 분은 있는 그대로의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굳이 나의 희망을 그 분께 아뢸 필요가 없이 그 분을 마주하는 것 자체로 우리의 영혼의 갈망이 채워진 가장 지고한 격정의 순간이 될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에는 할 말을 잃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에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 (인천교구 사제/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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