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루카 복음서 21장 1절-22절 해설-----송영진 모세 신부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Re:외국인과 사마리아 사람 | |||
다음글 | Re:외국인과 사마리아...마태오 10장5~7절 |1| | |||
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5-07-09 | 조회수2,844 | 추천수0 | |
(십자성호를 그으며) <루카 복음서 21장 1절-22절>
21장
<1절-4절 : 가난한 과부의 헌금> 앞의 20장 45절-47절의 율법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이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면 이 이야기는 율법학자들의 거짓 경건함과 가난한 과부의 참된 경건함을 대조시키는 이야 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용만 보면 부자들의 위선적인 봉헌과 가난한 과부의 참된 봉헌을 대조시키는 이야기입니다.
1절..<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당시 성전의 '여인들의 뜰'에 나팔 모양의 헌금함 열세 개가 있었습니다. 헌금함들은 헌금 목적대로 구 분되었는데 열세 번째 헌금함은 특별한 지향 없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을 넣는 헌금함이 었습니다. 전후 상황을 볼 때 아마도 과부의 헌금은 바로 열세 번째 헌금함에 내는 헌금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돈은 하느님께 바치는 번제물을 마련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헌금함 에 직접 돈을 넣은 것은 아니고, 사제에게 돈의 액수와 헌금 목적을 말하면서 돈을 내면 사제는 지정한 헌금함에 그 돈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들의 헌금 액수와 목 적,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 액수와 목적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은 헌금함들이 보관된 방 가까이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 모습을 일부러 세심하게 관찰한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예수님의 눈에 뜨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헌금 모습을 보시고 새로운 교 훈을 가르치십니다. '눈을 들어' 라는 말은 당시의 독특한 표현법입니다(요한 6,5). 공동번 역 성서의 '어느 날'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말입니다.
2절..<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빈곤한'이라 는 말의 원문 단어는 '무일푼의, 재산이 하나도 없는'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 기에 등장하는 '어떤 빈곤한 과부'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 중에서 가장 작은 동전인데, 그리스 은전 '드라크마'의 128분의 1입니다. (드라크마는 로 마 은전 데나리온과 같고,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하여간에 아 주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아주 적은 액수의 동전 두 닢을 헌금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 셨는데, 그 동전 두 닢은 그 과부가 가지고 있던 돈의 전부입니다(4절).
3절..<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이 말씀은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 게 말한다.' 라는 말은 당신의 말씀을 더욱 엄숙하게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라는 말은 겉으로 보이는 액수는 아주 적었지만 그 과부가 바친 헌금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바친 헌금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헌금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과 믿음 과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4절..<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 물 중에서 일부를 하느님께 바쳤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쳤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바쳤는지 보다는 자기 것으로 얼마를 남겨 놓았 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이 훨씬 더 많았고, 가난한 과부는 가지고 있던 것 을 바치면서 자기 것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바친 것입니다.) (헌금을 바치는 것은 내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자기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생각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당시 사제들의 재물을 대하는 태도는 율법학자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에서 부자들이 더 우대받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천대받았습니다. 헌금에 대한 이야기에 뒤 이어서 성전 파괴 예언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부자들만 존중하고 우대하면서 재물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종교와 그 성전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 니다. 그런 성전이라면 파괴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5절-6절 :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5절..<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 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여기서 '몇몇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 24장 1절과 마르코복음 13장 1절에서는 '제자들'로 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서는 청 중을 제자들로 국한시키지 않고 일반 백성들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앞의 20장 45절에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 승 자료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일 것입니다. 하여간에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감탄하자 그들에게 그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아름다운 돌'은 성전 건축에 사용된 귀한 돌들과 성전 장식에 사용된 보석들을 뜻합니다. '자원 예물'은 성전에 봉헌 예물로 바친 귀금속과 보석들을 뜻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내 부는 여러 가지 보석과 봉헌물들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을 방문 한 사람들은 항상 그 모습에 감탄했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6절..<"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이 구절의 예수님 말씀은 앞의 19장 44절에서 하신 예루살렘 멸망 예고 말씀과 비슷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들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라 는 말은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예언은 단순히 한 건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유대교의 예배와 전례가 종말을 고한다는 예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라는 종교는 남아 있겠지만 구약시대 때부터 성전에서 해왔던 희생제 사는 끝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서기 70년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서기 66년-70년에 로마 제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했지만 그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서기 70년 8월 29일 로마군 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불태워 버렸고,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완전히 파괴되 었습니다.
<7절-19절 : 재난의 시작>
7절..<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 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여기서 '그들'은 앞의 5절에서 성전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그 일이 언제 일어나게 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은 원문대로 '선생님'이라고 바꿔야 합니다. 원문에는 제자가 아닌 사람들이 일반적인 존칭으 로 사용하는 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자가 아 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말씀도 제자들만을 향해서 하신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24장과 마르코복 음 13장에서는 제자들만을 상대로 가르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승 과정에서, 또는 자 료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반 백성으로 확대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라는 질문은 일차적으로는 성전 파괴가 언제 일어나느 냐는 질문이지만, 이 말에는 종말이 언제인가,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를 곧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라는 말은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또는 종말이 오기 전에) 어떤 표징이 있게 되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당연히 그 일을 알려주는 표징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표징이 나타난다면 미리 알고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절..<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 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예수님께서는 우선 '거짓 메시아들에게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라고 당 부하십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예수 님의 예언대로 실제로 그 당시에 가짜 메시아가 많이 있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라는 말 은 '나의 권위로, 나라고 주장하면서' 라는 뜻입니다.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 다. 라고 말할 것이다.' 라는 말은 '자기가 부활한 예수이며 구세주라고 자칭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자칭 재림 예수가 많이 있습니다.)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라는 말은 '곧 종말이 온다고 말할 것이다.' 라는 뜻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서 종 말이 오기까지는 시간 간격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 뒤를 따라가 지 마라.' 라는 말은 그런 거짓 예언자나 가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8절은 거짓 예언자나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종말의 표징은 아니라 는 뜻이기도 합니다.)
9절..<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사람들은 흔히 전쟁, 반란, 내전 같은 일이 생기면 곧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이 생겨 도 무서워하지도 말고 종말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로 번역된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전쟁과 반란을 듣더라도' 인데 '소문'보다는 '소식'이 원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말은 전쟁과 반란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종말이 왔다고 생각해서 무서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이라는 말은 종말이 오기 전에 먼저 전쟁이 일어 날 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반드시' 라는 말은 그런 일들이 하느님의 섭리(계획)에 속해 있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한 과정 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먼저' 라는 말은 종말에 '앞서서' 전쟁이 일어난 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마치 무슨 일정표가 있어서 그 순서대로 종말이 진행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여간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겠지만 그것 이 종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끝'이라는 말은 시대의 마지막, 즉 종말을 뜻합니다.
10절..<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 어나며,>--이 구절은 9절을 다시 설명한 것인데,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라는 말 은 내전이나 반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많은 민족이 섞여 있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는 국가 간의 전쟁을 뜻합니다.
11절..<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 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큰 지진, 기근, 전염병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 었던 재난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연재해가 종말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리고 지난 이천 년 동안에도 그런 일은 많이 있었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생기는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재해를 겪을 때마다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지 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종말의 표징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천문학적 현상이나 점성술사들이 생각하는 어떤 표징을 뜻할 것입니다. 어떻든 이 말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어떤 일들이 하늘에서도 생긴다는 뜻인데, 지금 예수님은 그런 일들이 생긴다고 해도 종말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중이기 때문에 이것은 뒤의 25절에서 말하는 종말의 표징들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12절..<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 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2절은 신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언한 구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8절-11절에서 말 한 재난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에 앞서' 라는 말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박해가 먼저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내용으로는 시간적으로 박해가 먼저 있게 된다는 뜻보다는 '그런 일들 보다도 박해가 더' 사람들로 하여금 종말을 의식하게 만들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손을 대어' 라는 말은 '붙잡아', 또는 '체포하여'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라는 말은 붙잡혀가서 재판을 받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형태의 박 해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12절은 붙잡혀가서 당하게 될 박해를 설명한 것이고, 16절은 가정에서 받게 될 박해를 말한 것이고, 17절은 모든 사람에게서 받게 될 박해를 말한 것 입니다.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뜻합니다. 당시 회당은 사소한 문제를 다루는 법정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범법자들을 매질할 수 있 었습니다. '감옥'에 넘긴다는 말은 정식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박해를 뜻합니다. '내 이름 때문에' 라는 말은 박해를 받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라는 말은 이방인들 의 박해를 뜻합니다. 임금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와 임금들이고 총독들은 로마 제국 내의 식민지들을 다스리는 총독들입니다.
13절..<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이러한 일'은 붙잡혀가서 재 판을 받는 일인데, 재판은 박해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 스테파노, 바오로 등은 재판을 받을 때 그 재판을 예수님에 관해서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13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너희는 증거가 될 것이다.'인데, 직역대로 해석하면 신자들이 붙잡혀가서 박해를 박는 일들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 때에 신자들에게는 유리한 증거가 되고 박해자들에게는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박해는 곧 하 느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 문맥으로는 앞에서 해 석한 대로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로 번역되지만, '증거가 될 것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14절-15절..(14)<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재판을 받게 되더라도 멋진 웅변을 하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언변과 지혜'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 라.' 라는 말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재능으로 변론을 하려고 애쓰지 말고, 미리 연습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라는 말은 특별히 당부한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적대 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이라는 말은 어떠한 박해자도 하느님의 섭리와 지혜에 맞 설 수 없고 하느님의 말씀을 반박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언변과 지혜' 라는 말은 여기 서는 인간적인 웅변 기술이나 인간적인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능 력과 하느님의 지혜를 뜻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는 신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시 겠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앞의 12장 11절-12절에서는 성령께서 답변할 말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도와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뜻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들이 원래는 배운 것 없고 무식한 신자들이었지만 재판관 앞에서 당당 하고 침착하게 답변하면서 재판관들을 쩔쩔매게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일은 초대교 회 때의 박해에서도, 그리고 조선시대의 박해에서도 자주 있었습니다.
16절..<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에게서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족이나 친구 의 박해가 더 심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12장 51절-53절에서 이미 가족의 분열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분열이 박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를 넘겨' 라는 말에는 가족이나 친구가 당국에 신고를 해서 잡아가게 한다는 뜻과 직접 붙잡아서 넘긴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라는 말에도 당국에 넘겨서 사형을 받게 만든다는 뜻과 직접 죽인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더러는'이라는 말은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가족이 직접 박해를 하고 죽이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17절..<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앞의 6장 22절에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는 처음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정신과 세상의 정신이 대립하고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 미움에 대한 설명이 요 한복음 15장에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 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여기서 '내 이름 때문에'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미 움'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박해를 다 뜻하는 말입니다.
18절..<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이 구절과 똑같은 말이 사도 행전 27장 34절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 다고 일행을 격려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영적인 안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고 죽는 일이 생기더라도(육체적인 목숨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너희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 을 잃게 되더라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게 될 것이고, 부활의 그날 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박해로 잃는 것은 하나도 없다 는 것입니다.
19절..<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이 구절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참고 견 디라는 명령입니다. 박해를 받고 지상의 생명을 잃을 수는 있지만 인내하는 사람은 영원 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는 박해를 받아도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죽을 때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뜻합니다.
<20절-24절 :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다> 이 대목은 7절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으로서 예루살렘 멸망의 표징과 멸망할 때의 상황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20절..<"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 아라.>--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것은 멸망이 가까이 왔다는 표징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이미 앞의 19장 43절에서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19장 44절과 21장 6절에서 말했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가까이 왔다는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알아라.' 라는 말은 '깨달 아라.' 라는 뜻인데,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았으면 빨리 어떤 행동을 해야 합니다. 21절은 사람들이 해야 할 행동을 말씀하신 구 절입니다.
21절..<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 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그때에'는 '예루살렘이 포 위될 때에'입니다. '유다에 있는 이들'이라는 말은 유대인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산으로 달아나고' 라는 말은 유다 지역 밖으로 달아나라는 뜻입니다. 유다 지역 자체가 산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산'은 유다 지역 밖에 있는 산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달아나거나 사해 부근의 산이나 동굴로 달아나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라는 말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봉쇄되기 전에 도시를 빠져나가라는 뜻입니다. '시골'은 예루살렘 밖의 지역을 뜻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모두 예루살렘에서 멀리 도망치라고 하시는 것 은 예루살렘 멸망은 하느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19장 44절).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심 판으로 멸망하는 도시에 있다가 함께 휩쓸려서 멸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비나 방위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고, 그저 달아나 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뜻도 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번역된 말의 원문은 '그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22절..<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이 구절은 예루살렘을 피해서 도망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멸망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이기 때문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열왕기 상권 9장 6절-9절과 다니엘 9장 26절과 미카 3장 12절 등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징벌의 날'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내리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