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이야기: 우연과 필연 사이, 룻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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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12-14 | 조회수3,042 | 추천수0 | |
[성경 이야기] 우연과 필연 사이, 룻 이야기
카리스마적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판관기는 마지막에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좋을대로 했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아직 기준이 되는 법이나 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무질서와 혼란이 가득한 뒤죽박죽 어지러운 세상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암흑 속에서도 여명은 비칩니다. 판관기 다음에 나오는 책이 ‘룻기’이기 때문입니다. 룻기가 비록 혼란한 판관시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1,1) 룻기 마지막에서 보게 되는 희망의 빛은 바로 ‘다윗’입니다.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4,22)이기 때문이지요.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세 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인 룻기는 모압 출신인 ‘룻’이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룻은 유딧이나 에스테르와는 달리 이방 여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룻기가 판관시대를 배경(1,1)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가지만 사실 그보다는 훨씬 후대인 유배 이후에 기록된 책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무너 진 고국을 재건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공동체 인식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에 주력했습니다. 예를 들면 철저한 율법준수와 공동체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인 이방여인과의 엄격한 결혼금지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적 결속은 이스라엘 이외의 국가를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국가관을 형성하였고, 결국에는 편협한 유대주의에 사로 잡히게 만들었습니다.
룻기는 이러한 사상이 팽배하고 있을 무렵, 하느님의 보편적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며 배타적인 민족 우월주의 시각을 수정합니다. 룻기를 보면 이야기의 주인공 ‘룻’을 거론할 때 마다 그녀가 ‘이방인 모압 여인’임을 강조하는데 ‘모압 여인’ 이라는 말은 룻기 전체에 일곱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룻처럼 훌륭한 여인이 있다는 것과 그녀가 다윗의 증조할머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지나친 배척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지요.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그 인물의 삶을 그대로 반영해줍니다. 나오미의 이름은 ‘기쁨’,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삶을 보면 비록 그녀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지만 며느리 룻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또 말년에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 이름이 나오미의 생애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두 아들의 이름이 조금 불길합니다. 한 아들의 이름은 마흘론으로 ‘병약한(연약한) 자’ 혹은 ‘질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아들은 킬욘인데 ‘황폐하다’라는 의미의 순 히브리어 이름입니다. 이 두 아들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타향에서 일찍 죽게 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들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룻기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는데 주력하는 역사책이라기보다는 교훈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점에서 ‘역사적 교훈소설’ 혹은 ‘민담’에 가까운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타향에서 죽었습니다. 남자 셋이 죽고 여자 셋이 남았습니다. 고대에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노동력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고, 그 집안이 무너졌다는 말이며, 모든 보호막이 사라졌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속적으로 잃은 나오미는 자신이 처한 비참한 형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나오미에게는 두 이방인 며느리, 룻과 오르파가 있었습니다. 룻은 ‘우정’, ‘친구’라는 뜻이고 오르파는 ‘목덜미’ 라는 의미인데 ‘누군가에게 등을 돌린다.’는 뜻으로 ‘냉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름처럼 룻은 나오미와 함께하지만 오르파는 떠나갑니다.
아울러 룻기가 등장인물의 이름과 더불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또 하나의 방법은 예기치 않게 일어난 듯 펼쳐지 는 사건들, 즉 우연을 통해서입니다. 룻기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한 가족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룻기에서 하느님은 숨어계시는 분이고 또 눈에 띄는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으십니다. 룻기가 강조하는 하느님의 특성은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느님, 우연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룻기에는 유난히 ‘우연히’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집안이 몰락한 상황에서 고향 예루살렘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고,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그 밭이 ‘우연히’ 친척 보아스의 밭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그 시각에 보아스가 일꾼들을 격려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룻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때마침’ 나오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지나가고 보아스가 그와 흥정을 합니다.
이처럼 룻기의 모든 사건들은 ‘우연’과 ‘때마침’이란 단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룻이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우연의 연속인 듯 보이지만, 하느님의 편에서는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기회인 것입니다. 룻기에 ‘우연’이라는 단어와 ‘마침’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의 계획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건 대 부분이 마치 우연을 가장하여 진행되는 듯 여겨지지만 우연은 하느님의 필연적 섭리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우연인 듯 보이는 필연으로 하느님의 넘치는 은혜를 보여주는 책이 룻기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룻기는 단순히 ‘룻’이라고 하는 한 여인의 미담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보여주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룻기는 우리의 삶이 ‘우연과 필연 사이’에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매일의 삶 안에서 ‘우연’으로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월간빛, 2021년 12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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