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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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5-08-17 | 조회수1,582 | 추천수1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33)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
37.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1) “이미”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죄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죄악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더 강력한 것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악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시게 되었고,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분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셔서 교회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현실 세계 안에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죄악에 몰두해 있고, 교회는 세상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미 당신의 교회 안에 현존하지만, 아직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루카 21,27) 오시는 왕의 지상 내림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로 악의 세력의 뿌리는 정복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1항). 왜 예수님의 승리가 이 세상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세상의 악을 일거에 치워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무시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 깨닫고 당신께로 돌아오기 바라시는 마음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든 이루어질 수 있지만, “믿지 않는”(로마 11,20)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함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인정할 때까지 보류되고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4항). 2)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 하느님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지상의 교회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신앙으로 응답하며 시작되었지만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으며, 악의 세력과 투쟁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안을 통하여 그 여정을 계속하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십자가와 죽음을 전하면서 전진한다”(교회헌장 8항). 하느님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깨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상황은 마치도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도 같습니다. 남편이 오랫동안 소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편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기다림 속에서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아내의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실한 아내라면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사는 교회는 “기다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지 않고 세상 사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충실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 순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매년 대림절을 지내면서 참된 기다림의 삶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기 위하여 특히 성찬 전례 중에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1항). 3) 순례하는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삶이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더 깊이 살펴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막연히 기다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그분을 기다립니다. 199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내쉬(J. Nash)는 천재였지만 정신분열증 환자였습니다. 내쉬 교수의 가능성(그의 천재성)과 목표(노벨상) 사이에는 현실적 난관(정신분열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헌신적인 아내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 좌절할 때마다 그녀는 남편이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었습니다(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한 번 보세요).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여정에 늘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제 다 틀렸다”라고 말하며 기다림을 포기할 때, 그들을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오늘날 이 세상을 순례하는 우리 교회 안에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남편을 막연히 기다리는 아내가 아니라, 계속 남편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기다리는 아내와 같습니다. 4)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심판의 두려움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심판은 오히려 기쁜 소식입니다. 순례하는 교회로서 고통스런 기다림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분의 재림과 심판은 그토록 고대하던 기다림이 보답을 얻는 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총을 거절한 사람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며, 각자가 한 일에 따라 받을 뿐 아니라, 사랑의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9항). [2013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일 의정부주보 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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