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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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6-01-24 | 조회수1,517 | 추천수0 |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서의 세계 - 신약] 백성의 죄를 위해 희생된 어린양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복음에서 독자는 외관상 단순하지만 비범한 깊이를 지닌 표현들을 계속해서 대하게 된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사실 자체가 언제나 그분의 교리에 대한 어떤 새로운 관점을 가리키기 위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명백히 무의미하게 보이는 사실들도 이야기 전체에서 각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숫자들 자체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동시에 적절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거의 신비적인 비전을 불러일으킨다.
네 번째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 자체도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때는 그들 역시 상징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더욱 오래된 복음서들에는 엄격함과 굽힐 줄 모르는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살과 피’를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는 세례자 같은 인물은 요한 복음에서 일종의 이상(理想)으로 육화된다.
이 복음서에서는 세례자의 개념 또는 출생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헤로데에게 체포된 사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며, 감옥에서 목이 잘리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조차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 대한 표명만이 네 번째 복음서에서 중요하고 의미있다. 그러한 표명은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요한 1,7)는 서문의 한 구절에 종합되어 있다. 세례자는 설교의 삶으로 증언했고, 이와 상응하여 설교자의 모습은 특징적인 말씀, 즉 “나는… 소리요.”(요한 1,23)로 소개된다. 말하자면 세례자는 하나의 소리가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은? 모든 복음서의 지배적인 모습은? 이 주요 인물도 네 번째 복음서에서 상징적인 실재로 묘사되는가? 어떤 특징적인 모습으로 강조되는가?
그러한 주요 인물은 오로지 네 번째 복음서 안에서만 서문에서부터 세상에 오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과 동일시된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시는 스승이다.
그러나 네 번째 복음서에서 천상 스승의 과제는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지닌 관점, 즉 가르침을 통한 구원은 다만 부분적인 구원일 뿐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반면에 예수는 그분의 수난으로도 구원을 가져오셨다. 요한이 수난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 관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무엇보다도 그의 독자들에게 상징을 통하여, 정확하게는 파스카의 어린양의 상징을 통하여 차근차근하고 끈질기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관점이다.
이미 예수에 대한 첫 표명에서 요한은 세례자에게 두 번에 걸쳐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29. 37)라고 증언하게 하고, 한번은 여기에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이라고 붙이게 함으로써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고 따라서 다양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구약성서의 다른 어떤 본문에서보다 여기 파스카에서는 희생된 어린양의 화해하는 특성이 강조된다.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같은 복음서 저자는 고의적이지 않고 단순히 다시 한번 파스카의 어린양을 암시한다. 실제로 더욱 오래된 다른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께서 파스카 잔치 때 마지막 만찬을 거행하였다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한다(마태 26,17; 마르 14,12; 루가 22,7. 15).
요한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는 분명히 다른 일치점(연결점)에 대해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앞에서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금요일 이른 아침에 다시 한번 그들의 파스카 만찬을 거행해야 했다. “그들은 부정을 타서 과월절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까봐 총독 관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요한 18,28). 따라서 예수께서는 파스카 축제 전야에 단죄되어 죽음에 처해지셨고, 그분을 십자가에서 내려 매장하는 일조차 분명히 서둘러서 진행되었다. “다음날 대축제일은 마침 안식일과 겹치게 되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시체의 다리를 꺾어 치워달라고 청하였다” (요한 19,31).
이것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파스카의 어린양들이 의식적(儀式的)으로 희생된 시간에 예수께서는 도시의 문 밖 갈바리아 산의 십자가에 달려 그 백성의 죄를 위해 희생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례자의 목소리는 오래 전에 침묵을 지키게 되었으나 이것은 그의 목소리,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29)가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요한에 따르면, 이 어린양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파스카의 어린양에 대해서 구약에서 지정된 것을 완성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요한 19,36). 그것을 알지 못하는 유다 지도자들과 이방 군인들은 예수를 참된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만들었다.
요한은 풍부한 의식 속에 그분을 그렇게 묘사함으로써 우리 역시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현대의 어떤 해석학자들은 ‘어린양’으로 번역되는, 세례자가 사용한 말이 어린양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의미있는 희생자, 제물 그리고 또한 이사야가 말하는(49-55장) 야훼의 종을 분명히 참조하여 종을 뜻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talja’라는 것을 지지한다. 세례자가 그러한 말로 다만 참된 어린양 예수의 상징인 출애굽의 어린양뿐만 아니라 이사야가 선언하고 그가 지적하는 기쁨을 누린 고통받는 종도 암시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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