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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무슨 뜻인지요?.(고린후 5,21)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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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3-07 조회수1,055 추천수1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서에서 발췌했습니다.


①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의 연관문 갈라 3,13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고 하는데, 그 뜻인즉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② "죄로 만드시고"를 "속죄의 제사로 만드시고"라고 풀이하는 주석가들이 있는가 하면(랑,

마틴), 그런 풀이를 배척하는 주석가들도 있다(레옹뒤푸르). 그렇게 풀이하는 이들은 그 

근거로, 칠십인역 레위기에서 속죄 제사를 그냥 죄로 약칭한 사례들을 내세운다(4,21.24;

24,5;12,6.18).


③ "하느님의 의로움"(디카이오쉬네 테우)이라는 표현은 바올로 친서군에 열 번 나온다

(2절; 필립 3,9; 로마 1,17; 3.5.21.22.25.26;10,3 두 번). 하느님께서는 구원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까닭에, 그분은 의로우시고 또한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로마 3,26). 하느님의 

이같은 성품과 처사를 일컬어 바올로는 "하느님의 의로움"이라고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누리면 의롭게 된다. 곧 의인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나? 율법의 행업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바울로는 확신했다. 그는 갈라티아서와 로마서에서

이 확신을 상론했다. 바올로의 구원관은 요즘 말로 옮긴다면, 자력구원은 전적으로 불가능

하고, 오직 타력구원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이 자신의 공덕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

을 천주교회에서는 의화론(義化論) 또는 성의론(成義論)이라 하고, 개신교회에서는 의인론

(義認論), 인의론(認義論) 또는 칭의론(稱義論)이라 한다. 우리나라 개신교계 글들을 보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 ,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 같을 표현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그 신학

적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말 어법상 도대체 이런 표현들이 매우 의심스럽다(개신교계 

최근 논문으로는, 김창락 「새로운 성서해석과 해방의 실천」[한국신학연구소 1990]371-

471 참조). - 발췌 끝 -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 2코린 5,21) 


이사야서 52장 13절 이하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는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앙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내 박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10)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요한 15,15ㄴ)


그러니까 우리를 친구라 불러주신 예수님께서 친구인 우리들이 죄로 인해 영원한 벌을 

받게 될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친구들을 위해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겠다"고 하시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사랑에 감동하셨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그 큰 사랑을 인정해 주셨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을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기셨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죄를 모르시는 분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으니, 그 자체로 죄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 죄를 인정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죄선언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죄가 예수님께 옮겨갈 수 있었을까요? 

구약성경에 보면 속죄 제물을 바칠 때 '흠 없는 제물'을 마련해서 그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주님 앞에서 그 제물을 잡습니다. (레위 4장 참조) 그러니까 우리도 '흠 없는 제

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죄가 있다고 뒤집어 씌우고 박았다는 것입니다. 사

실은 자기들이 죄인이면서, 오히려 '죄 없는 분'께 우리들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찌른 것이

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마치 레위기에서 속죄 제물을 바쳤던 것과 같은 의미로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요한 11,50-52)


그러니까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언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지요? 이러한 이해 안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 2코린 5,21) 하신 이 말씀이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상은 개인적인 묵상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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