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들: 아가의 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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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05-04 | 조회수2,545 | 추천수0 | |
[성경 속의 여인들] 아가의 여인
아가는 사랑 이야기다. 사랑하는 남녀가 주고받는 말마디들 사이에서 사랑에 대한 사유가 넘쳐난다. 다소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사랑 표현이 성에 있어 보수적인 유다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툰 우리 신앙인에게도 낯설게 다가온다. 과감한 성적 표현에 대한 논란은 대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비유로 이해하는 선에서 갈무리되곤 했다.
본디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알맞은 협력자였으나 먹지 말아야 할 열매를 먹은 이유로 여자는 남편을 갈망하고 남편은 여자의 주인이 되어버렸다(창세 3,16). 조화와 질서의 남녀관계가 주종의 억압적 관계로 돌변했고 함께 사는 것은 알맞은 협력이 아닌 서로에 대한 책임과 고통이 되어버렸다.
아가의 이름 모를 남녀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 깨져버린 사랑의 관계를 회복한다. 서로는 서로의 것이 된다.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아가 2,16)이라 되뇌는 여인의 모습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인에 대한 애정이 드러낸다. 서로에 대한 속박이 아닌, 늘 기다리고 늘 애타하고 늘 새롭게 만나길 소망하는 것으로 사랑은 그려진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아가 3,1). 간절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갈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연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네. 그러나 나의 연인은 몸을 돌려 가 버렸다네. … 그이를 불렀건만 대답이 없었네.”(아가 5,6).
아가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그럼에도 너무나 충만한 사랑을 기린다. 아가의 사랑은 닿을 듯 닿지 않는 서로의 거리가, 채워도 채워질 것 같지 않은 서로의 결핍이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채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을 하나였다가 반으로 쪼개진, 그래서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바탕으로 해석한다. 한쪽의 결핍을 다른 한쪽이 메워주는 사랑, 이건 아가의 사랑과 결이 다르다. 사랑은 비워진 것을 채우는 완전함이 아니라, 결여를 전제로 모르는 타자를 상상하는 관계의 예술이 아닐까. 채워지면 안 되는, 그러니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더 풍성하고 완전해진다는 모순 형용이 사랑의 언어이며 감성이 아닐까.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얼마나 더 달콤하고 그대의 향수 내음은 그 모든 향료보다 얼마나 더 향기로운지!”(아가 4,10) 서로의 부재를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것으로 채우는 건 사랑에 대한 모욕이다. 오감을 벗어난 사랑의 상상이 사랑을 더욱 자유롭게 한다. 사랑은 한계지워진 육체와 마음, 그리고 타자에 대한 감정 투사와 기대치를 벗어난, 그야말로 해방 자체다. 그 해방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불같은 사랑이된다(아가 8,6에 사랑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샬헤베트야’는 우리말 번역에 ‘격렬한 불길’로 번역되었지만, ‘하느님의 불길’이라고 직역된다).
결여와 부족을 껴안는 사랑, 그 속에 펼쳐지는 해방의 가치는 예수가 보여줬다. 힘없고 무능하고 거기에 완고하기까지 한 인간을 인간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한 이가 예수다. 예수는 아가의 여인이다. 결핍을 사랑할 줄 아는 남자 예수 안에서 사랑에 대한 경외와 그로 인한 죄책감이 밀려든다. 사랑을 감히 알지 못했고, 사랑을 감히 실천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는 아가의 여인 앞에서, 그리고 예수 앞에서 부끄러이 고백한다. 이제껏 사랑의 이름으로 저지른 나의 이기심과 교만을 용서하소서….
[2022년 5월 1일 부활 제3주일(생명 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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