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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장하는 나라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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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4-23 조회수1,686 추천수0 신고

찬미예수님! 남충희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친히 뽑으셨던 제자단에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하늘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라나는 나라, 성장하는 나라라고 알려주신 것에 희망을 걸고 살아갑니다. 지금은
비록 성장하다 주위의 어떤 조건 또는 영향으로 인해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유다와
비슷하게 악마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어떤 속삭임에 빠져 잠시 병들기도 하고, 시들기
도 하고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셨던 제자단에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 이후의 교회 안에도

분명 유다와 같은 제자들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시는 대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오늘 마침 요한복음 13장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장면을 묵상하며서

교회 공동체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아갈 삶의 방향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 있었습니

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기 전에 이미 유다가 배신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발까지 손수 씻어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서도 유다처럼 이미 빗나간, 엇나간 제자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탓하지 않으시고 그의 발을 씻어주셨듯이 그렇게 그 사람의 발을 씻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아시면서도 아무런

내색 없이 유다의 발을 씻어주셨을까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참사랑을 느끼기기

원하셨다고 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그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고 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하시면서.

이 대목에서 예수님의 유다를 향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백 마리의 양 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시는 분이시라는

전제에서 생각해 볼 때 유다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으나 회개하지 않는 유다를 보시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결국 유다는 악마가 넣어준 생각대로 일을 진행할 것임을 환하게

아셨지요. 그랬을 때에 남은 열한 제자들에게 유다가 당신을 팔아먹은 이후 제자단에

돌아오거든 내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유다의 발을 씻어준 것처럼 너희들도 돌아온

유다의 발을 씻어주어라.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아, 예수님은 유다의 마지막까지 책임지셨건만 유다는 끝내 스승의 바램을 저버렸습

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이후 공동체로 돌아왔다면 열한 제자는 예수님이 하

셨듯이 그렇게 유다의 발을 아무 말없이 씻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만약

유다처럼 신천지든, 어떤 사이비 이단이든 나갔다가 돌아오는 형제가 있거든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의 발을 아무 말 없이 씻어주신 것처럼 씻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단죄할 권리는 없습니다. 다만 형제의 발을 씻어줄 의무만 받았을 뿐이

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좋은 묵상 재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마침 오늘은 그동안 바빠서 읽지 못했던 야곱의 우물을 읽으면서 저 자신이 유다의 모습

으로 살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살고 있는지 성찰하도록 하는

부분이 있어서 성찰을 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성찰을 할 수 있는 묵상이라서 옮겨옵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있었는데(요한 13,23) 

 

오늘 복음에서 유다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먼저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축제에 필요한 걸 사고, 가

난한 이들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주는 역활도 할 만큼 중요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에

겐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다. 예수님이 빵을 건네실 때나, 가서 하려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실 

때도 아무 대답이 없다. 그와 예수님 사이에는 예수님이 일방적인 소통과 관심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 외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궁금한 게 있으면 '더 다가가' 망설임 없이 물을 만큼 예수

님과 소통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것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지라도 상관없다. 마음이 서로 

오간다는 게 그에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모습은 결국 완전히 다른 결말로 이어진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여 그분을 십

자가 죽음으로 이끈 반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제자 공동체를 일구고 변함없이 예수

님을 섬겼다. 이런 걸 보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결국 어떻게 끝날지는 얼마나 그분과 대화하고 

함께 나누었는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많이 알고 대단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그분

과 끊임없이 소통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야곱의 우물 2016년 3월 22일  http://www.pauline.or.k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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