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4월 25일 독서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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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6-04-26 | 조회수1,428 | 추천수0 | 신고 |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16,15-20)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또한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일했으며(1베드 5,13),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이다.
제1독서 말씀 베드로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쓴 편지를 보내며, 모든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의 인사도 전한다.(베드로 1서 5,5ㄴ-14)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1베드5,5ㄴ-14) 미카엘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5ㄷ)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덕인 겸손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다.
아마도 베드로는 최후 만찬 전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장면(요한13장)을 연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겸손을 앞치마처럼 두르고 서로 섬기라는 의미의 권면(5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본문에서 '교만한 자'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노이스'(hypereoanois)의 원형 '휘페레파노스'(hyperepanos)는 '~위에, 너머에' 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빛이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노'(p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들 위에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은 인간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데까지 이르게 되는데(창세3,5 ;이사14,13.14), 이것이 바로 교만의 극치이다. 하느님은 그런 자들을 대적하신다.
여기서 '대적하시고'로 번역된 '안티탓세타이'는 '안티탓소마이'(antitassomai)의 현재 직설법이다. 이것은 '~반대하여', '~에 대항하여'란 의미의 전치사 '안티'(anti)와 '놓다', '두다'란 의미의 동사 '탓소'(tass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대적하다'(사도18,6)뿐 아니라 '물리치다'(야고4,6)란 의미까지 지닌다. 이것은 적을 궤멸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이나 그 결과를 나타내는 군사 용어로서, 매우 강렬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철저히 패망하게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는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 라고 했다. 반면에 하느님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하게 섬기를 자를 높여 주시는 분이다.
본문에서는 '대적하시고'에 해당하는 '안티탓세타이'(antitassetai)와 더불어 '(은총을)베푸십니다'에 해당하는 '디도신'(didosin)역시 모두 현재 직설법인데, 이것은 교만한 자에게 임하는 화와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복이 상황과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절대 불변하는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6)
여기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손'이라고 번역된 '케이라'(cheira)의 원형 '케이르'(cheir)는 일반 명사로서 신체의 일부인 '손'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때때로 권한, 소유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할 때도 있다.
예를들어,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위탁한다고 했을때에 그것은 곧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권한에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루카23,46)
또한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속한 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표현에서도 '케이르'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다.(요한10,29). 이 단어는 아버지께서 만물을 아들의 권위에 복종시켰다는 표현에서도 사용되었다.(요한3,35 ;13,3)
이상에서 '케이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는 소유, 권리, 권위, 능력, 주권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을 보게된다. 더구나 본절에서 '손'이란 명사앞에 '강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아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라는 말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 혹은 통치 아래에서' 라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본문은 '하느님의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이러한 권고를 따를 때에 뒤따르는 보상이 언급되는데, 그것은 바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는 것이다.
'여러분을'로 번역된 인칭대명사 '휘마스'(hymas)는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즉 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진 자만을 높이시는 것이다.
'때'에 해당하는 '카이로'(kairo)의 원형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주권하에서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결정적인 때, 또는 하느님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때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때'는 그리스도인이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의 경륜 안에 있으며 하느님 아래에서 겸손한 자가 높여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때가 이 세상의 어느 한 때인지, 아니면 재림 후 심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두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성경의 흐름속에서 본문의 '때'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7)
본절에서 11절까지는 고난 중에 굳게 설 것에 대한 권면이다. 그리고 12-14절까지는 본 서신의 결말 부분으로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이 담겨 있다. A.D.64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본서는, 기록된 지 얼마 후 로마 대화재 사건이 있었고 당시 로마 황제 네로가 이를 그리스도인의 고의적 방화로 그 누명을 덮어씌움으로써, 정말 피비린내 나는 대박해가 있었다.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이제 스스로의 죽음도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면서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든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마치 유언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굳세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는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든 걱정을 주님께 내맡기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기서 '걱정'(염려)으로 번역된 '메리므난'(merimnan)의 원형 '메리므나'(merimna)는 본래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메리죠'(meriz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마음이 나누어 지는 것, 상이한 방향들로 분산되는 것을 뜻한다.
즉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걱정'(염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걱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긍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걱정의 자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걱정을 주님께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예수님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는 자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마태오 복음 6장 25-33절에서 하셨고, 루카복음 10장 38-42절에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간섭하면서 마음이 나누어진 마르타의 행동을 지적하며 꾸중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필리피 서간 4장 6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우리는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맡기십시오'에 해당하는 '에피립산테스'(epiripsantes)는 '~의 위에' 혹은 '위를 향하여'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던지다'(루카17,2)란 뜻의 동사 '립토'(ri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위에 던져버리다' 혹은 '위를 향하여 던져 버리다' 라는 의미를 가진 '에피립토'(epiripto)의 명령의 의미를 지닌 분사로서, 6절 상반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
종합하면, 우리들 마음의 관심사들을 독점하는 것이 결국 걱정(염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겨버리고 주님의 주권적 경륜 아래에서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심시오. 여러분이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8-9ㄱ)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넵사테(nepsate)는 '근신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의미이다. 또한 '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그레고레사테'(gregoresate)는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단순히 잠에서 깨어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권고나 요청에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적 경각심에 대한 이러한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완벽한 헌신이 흔들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이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영적 경각심을 갖고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1코린16,13)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사도 베드로는 과거 겟세마니 동산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 마귀에게 삼키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러한 호소는 자기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것으로, 자신과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가슴 절절한 권면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적대자'에 해당하는'안티디코스'(antidikos)는 법정 용어로서, '소송의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이다.(잠언18,17) 이 단어가 마태오 복음 5장 25절과 루카복음 12장 58절에서는 '고소한 자'로 번역되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꼐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베드로 사도가 마귀(악마)를 '안티디코스'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고 참소하는 마귀의 특성(욥기1,6-2,7 ; 묵시록12,10)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 마귀는 그 틈을 이용해서(에페4,27) 하느님께 참소한다.(묵시록12,10)
이러한 사실을 '마귀'(악마)에 해당하는 '디아블로스'(diablos)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디아블로스'는 '디아'(dia)와 '블로스'(blos)의 합성어인데, '디아'는 '관통하는(through)', '쪼개고 들어오는'의 뜻을 가진 전치사이고, '블로스'는 '(낚아채서)반대 방향으로 던져 버리다' (throw down)라는 뜻을 가진 '발로'(ballo)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마귀(악마)는 죄와 유혹을 통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쪼개고 파고 들어와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인간을 하느님 반대편으로 던져 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아블로스'는 '비방하다', '중상 모략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아발로'(diabalo)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방자', '참소자', ' 중상 모략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참소하는 자의 특성 및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는 자의 특성을 지닌 마귀 (악마 ; devil)라는 의미로 쓰였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로 번역된 '레온 오뤼오메노스'(leon oryomenos)는 '우는 사자'(a roarling lion)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배가 고파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모습이나 혹은 먹이를 잡아 두고서 승리의 환호의 표현으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구약의 에제키엘 22장 25절과 시편 22장 13절을 참조하면 된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볼 때, 우는 사자의 이미지는 먹이감을 움키고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두렵고 진인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한다. 이와같은 사상은 야고보서 4장 7절에도 나온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그리스도인을 피해 달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테이'(pistei)는 '신앙', '신뢰', '신실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피스티스'(pistis)의 여격이다. 이 용어는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중심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라'고 베드로는 권고하는데, 여기서 '굳건히 하여'로 번역된 '스테레오이'(stereoi)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단단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박해를 틈타 마귀가 행하는 위협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14ㄴ)
여기서 '평화', 즉 '에이레네'(eirene)는 '광야'를 의미하는 '에레모스'(eremo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적막한 광야의 분위기와 같은 평온함'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평온함은 외부에서 밀어 닥치는 소란과 위협 등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견고한 마음이며 모든 근심과 염려(걱정)와 두려움을 초월한 평정한 마음이다.
이런 '에이레네'는 그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만 주시는 것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요 열매이다.(갈라5,22).
질문하신 부분이 없어 참고로 보세요.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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