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바라사이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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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6-04-27 | 조회수1,726 | 추천수0 | 신고 |
[성경 속의 인물] 바리사이파 기원전 161년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하자 그의 동생 요나탄이 후계자가 된다(1마카 9,31). 희랍세력에 맞서던 독립운동의 리더가 된 것이다. 그러다 기원전 153년에는 대제사장직을 겸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제관이 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의 대제사장직 수락은 율법을 어긴 행동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율법준수를 생명으로 여기던 사람들(하시딤)의 반발이었다. 이렇게 해서 저항세력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에선 돌아섰지만 실생활에선 조직을 강화하며 잠복했다. 이들의 한 부류가 훗날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원조는 하시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나탄의 처신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관 계급을 축으로 한 기득권자들이었다. 그들은 율법보다 현실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들이 훗날의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란 말은 히브리어 파라쉬(parash 구분하다)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도 자신들을 페루심(Perushim)이라 불렀다. 직역하면 ‘분리되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에서 분리되기를 원했을까?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이다. 특히 레위기 11장부터 15장 사이에 등장하는 온갖 부정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과 희랍문화에 젖어 있는 유다인들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했다. 아무튼 이들은 문서로 되어 있건 구전으로 전해졌건 모든 계율을 충실히 지키려했다. 연구도 활발해서 율법에 정통한 이들도 많았다. 이들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율사’들이다. 율법 때문에 통치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박해도 받았지만 그때마다 민중은 이들 편에 섰다. 한편 이들은 성전 밖의 예배도 강조했으며, 동물을 바치는 제사뿐 아니라 기도와 율법 연구도 훌륭한 예배라고 주장했다.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해외로 떠돌 때 이들은 유대교의 길잡이가 된다. 그들은 성전 대신 회당(시나고그 Synagogue)을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되게 했으며, 때로는 현실의 상황에 맞춰 율법적응에도 융통성을 부여했다. 해외 유다인들(디아스포라)을 존속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던 회당과 학교였다. [2011년 6월 12일 성령 강림 대축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율법학자 율법학자는 구약성경의 소페르(sofer)를 번역한 말이다. 개신교에서는 서기관으로 번역했다. 어원은 사파르(safar) 동사로 ‘쓰다, 헤아리다’라는 의미를 지녔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도 소페르(sofer)는 학자를 뜻하는 말로 굳어져 있다. 이들의 출발은 글자 그대로 기록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필사하는 일에서 이들의 직분이 생겨났던 것이다. 다윗 시대에는 일종의 관료 신분으로 국가문서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투입된 것은 바빌론 포로시대 이후부터다. 글자를 알고 있었기에 민중계몽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배경은 ‘에즈라의 율법운동’이었다.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사제 에즈라는 해이해진 백성을 다잡기 위해 교육에 전력했는데 이들을 교사로 활용했던 것이다. 에즈라 이후 율법연구는 활발해졌고 성경과 구전으로 전해오던 계율들을 모아 ‘613조항’의 규정을 확정짓게 된다. 이것이 할라카(Halakah)다. 복음서에는 ‘조상들의 전통’으로 표현되어 있다.(마태 15,2) 한편 기원후 3세기 초에는 유다교 랍비들이 할라카를 새롭게 정리한 뒤 미쉬나(Mishna)라 불렀고 후대 학자들은 주석을 붙이며 재해석한 뒤 게마라(Gemara)라 했다. 둘을 합친 것이 ‘탈무드’다. 마태복음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스승님, (613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계율을 전공한 그도 답답함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단순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계명의 골자는 사랑에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오늘날의 랍비문학은 율법학자들이 출발점이며, 현존하는 구약성경 대부분도 이들이 필사체로 남겼기에 보존이 가능했다.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율법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 역시 이들의 헌신적인 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율법학자 대부분이 바리사이파에 속했고 제사장들은 사두가이파에 속했다. 그리고 두 파벌이 이스라엘의 귀족계급을 형성했으며 가나안에 살던 유다인의 1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한편 대다수 유다인들은 어느 파에도 속할 수 없는 단순한 ‘땅의 백성들’(암하레츠)이었으며, 귀족과 구분되는 평민이었다. [2011년 6월 2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교황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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