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 안의 성서해석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성서는 영적 여정을 위한 안내서 | |||
다음글 | 성경해석 - ‘상황 접근’ : 본문은 하나, 독자는 여럿 | |||
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6-04-30 | 조회수2,885 | 추천수0 | 신고 |
문헌 풀어 읽기 - “교회 안의 성서해석”
성경연구는 신학의 영혼
성경과 그 해석의 다양성
성경을 읽는 방법도, 해석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우리 주위에는 성경을 (함께 또는 홀로) 읽는 독서법이 많이 존재하고, 학문적으로도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은 여럿 있다. 그런데 한 분이신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하나인 성경인데, 읽고 해석하는 방법은 이토록 다양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성경 그 자체가 이유다. 성경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가 방대하고도 깊기 때문이다. 성경이 쓰여지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부터 3천 년도 더 되었다. 물론 그 이전의 구전전승까지 헤아리자면 훨씬 더 올라간다. 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된 성경에는 시도 있고, 이야기도 있고 율법도 있다. 하느님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칭송하고, 또 분노하고 울고 저주하기도 한다. 그들은 옳게 생각하고 행동하여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죄짓는 모습을 낱낱이 보이기도 한다. 노인의 지혜가 있는가 하면 청년의 패기도 있다. 오래 묵은 전승이 있는가 하면 혁신자의 용기도 있다.
이런 성경의 특성 때문에 성경의 본질이란 단일한 ‘책’보다는 오래된 ‘도서관’에 가깝다.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이토록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된 성경을 간단히 해석해서 단번에 정리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는 없다.
둘째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만큼이나 우리 인간의 삶도 다양하다. 성경은 노인도 읽고 청년도 읽는다. 도시인과 농부에게, 남성과 여성에게 다가가는 성경구절이 같을 리 없다. 학문적 목적으로 읽을 때와 사목적 목적으로 해석할 때 그 결과가 똑같을 수 없다. 전문적인 신학자들이 논구하는 내용을 예비신자 단계에서 알아듣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인종과 나라별로도 차이를 보이며, 과학의 언어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성경이 쓰여진 고대의 언어가 낯설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이 다양한 이 현실이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렇다. 고대나 중세에 널리 사용되어 인정된 성경해석이 현대인의 가슴에 별로 울림을 주지 못하는 사실도 쉽게 이해된다. 오늘 소개할 이 문헌의 서문에서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시대마다 나름대로 새롭게 성경이해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그래서 당연하게 이해된다.
이 문헌의 필요성
성경과 관련된 이런 ‘다양성’은 현대적인 특징이다. 특히 지난 이삼백 년간 인간적 학문은 놀랄 만큼 ‘발전’했는데, 그 성과를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이런 다양성을 특히 증진시켰다. 성서학의 이런 ‘발전’은 한편으로 감사할 일이지만, 일반 신앙인들은 물론 학자들에게도 약간의 혼란으로 비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다양성이란 표면 밑에 깊이 흐르는, 마치 강물의 저류 같은 하느님의 구원사적 의미라는 맥을 놓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때로는 새로운 성경해석 방법이 “나름대로 긍정적 요소를 지니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대되는 견해와 연결되는 것으로”(서문) 나타났다.
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민첩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사목적 신중함으로 그 대답에 조심스런 태도를 보여왔다.”(서문) 하지만 교회는 이런 다양한 방법론들이 어느 정도 성숙기에 들어 인간적 눈으로도 장점과 한계를 볼 수 있고, 역사적 학문적 사목적 견해를 밝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듯하다. 1993년에 나온 “교회 안의 성서해석(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이라는 문헌은 이렇게 성서학적 발전의 한 시대를 정리해주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곧, “문제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몇 가지 반성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가톨릭 주석의 역할에 관한 더욱 명확한 인식을 얻게 하는”(결론) 목적의 문서다.
역사비평 방법론
이 글은 많은 방법론의 의미와 장점과 보완점을 간략히 다루어 함축적인 문장으로 제시한다. 이런 함축적인 문장은 퍽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짧은 글에서 이런 방법론을 다 다룰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문헌은, 지난날 인간적 학문을 성경에 적용한 새로운 방법론 가운데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역사비평 방법론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 점만 짚고 넘어가겠다.
역사비평 방법론은 성서해석학의 역사에서 지난날 오해를 많이 받았고 숱한 논쟁을 낳았던 방법론이다. 이 문헌에서도 “역사비평 주석은 해체와 파괴로 보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주석가들은… 성경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경우도 있었다.”(I.가.1.)며 지난날의 논쟁을 기억한다. 하지만 “성경해석의 역사에서 역사비평 방법의 이용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방법 덕택에 성경 본문을 원래의 뜻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나타나게 되었다.”(서문)며 학술적 가치를 인정했다. 나아가 이 방법론을 맨 앞에서 제일 처음 다루었고, “역사비평 방법은 고대 본문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I.가.)며 현대 성서학의 대표적 방법론 가운데 하나임도 인정했다.
성경연구는 신학의 영혼
이 문헌은 방법론들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교회생활 안에서의 성경연구, 토착화, 전례, 사목현장, 교회일치운동 등에서 성경의 사용까지 지침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신앙생활 안에서 주석가들이 지니는 한계도 설명한다. 때로 주석가는 뒤로 빠져야 한다. 자구적인 해석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연구에서 근본주의적 접근을 뚜렷하게 경고하며(I.바.), 언제나 이성을 충분히 사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것을 권장한다.
현실에 맞춰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확실하고 기댈 만한 방법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IV.가.2.). 어쩌면 성경을 마음속 가장 높은 곳에 모시고, 다른 것은 잠시 뒤로 물릴 때도 필요할 것 같다.
어느 한 방법론에 빠지지도 않고, 방법론 저마다의 본래 목적과 그 성과와 보완점까지 충분히 익힌다면, 그래서 신앙생활 안에서 알맞게 사용한다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 의미를 더욱 풍부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신학의 목적이 그렇듯이, 성서학도 “신앙의 심화”를 주요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끝으로 성경해석의 첫째가는 의미는 다음의 문장이 웅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서문의 맨 첫 문장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의 말이며, 교황 레오 13세 말씀의 인용이다. “성경연구는 신학의 영혼과 같다.”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우리 영혼이 기운 차리고 하느님을 향해 밝게 웃었으면 한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과 고대근동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이며 서강대 강사이다.
[경향잡지, 2009년 11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