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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 해설 묵상] 루카 11,1-28 ----송영진 모이세 신부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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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6-05-12 조회수5,007 추천수0

 

<루카 복음서 11장 1절-28절>

 

11장

 

<1절-4절 : 주님의 기도>

 

1절..<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

    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어느 날 어떤 곳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

    습을 본 제자 하나가 자기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

    도하셨습니다. 대개는 제자들과 떨어져서 혼자 기도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는 제자들이 옆

    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예문을 가르쳤는

    데, 세례자 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어떤 기도를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구분되

    는 자기들만의 기도문,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특징을 나타내는 기도문을 원

    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방법'을 뜻할 것입니다.

 

2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기도할 때' 라는 말은 '기도

    할 때에는 항상 언제든지'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여라.' 라는 말은 기도할 때 꼭 '이대

    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

    의 기도는 하나의 예문이고, 기도의 모범입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대화의 상대를 부르는 것처럼

    하느님을 부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이것은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처럼 제자들도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라셨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라는 말의 원문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여기서 '이름'은 하느님 자신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 인간들에 의해 하느님이 거룩해진다는 말인데, 이 말은 인간들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경외하고 예배함으로써 이 세상에 거룩하신 하느님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

    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청하는 것은 숨어 계신 것처럼 보이는 하느

    님께서 이 세상에 당신 자신을 거룩하신 하느님으로 완전히 드러내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

    입니다. 동시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

    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라는 기도는 하느님의 통치가 완성되기를 비는 기도입니

    다. 또 하느님의 통치가 완성될 때 받게 될 축복을 청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하

    느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지만 지금은 은밀한 통치이고 미완성 상태입니다. 그러나 종

    말이 되면 하느님의 통치가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고, 완성될 것입니다. 또 하느님 통

    치의 완성은 사탄의 활동이 완전히 끝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아버지

    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라는 기도는 하느님의 통치가 완성되고 사탄은 멸망하게 되는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비는 기도입니다.

    마태오복음 6장 10절에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기도가 더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없습니다. 루카가 이 구절을 생략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뜻'이 '아버지의 나라'에 포함된 것으로 생각하고 생략했을 것이

    라고 추정합니다.

 

3절..<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날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이라는 뜻도 되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

    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는 기도는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면서 오늘 하루의 양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탈출기 16장의 만나 이야기를 보면 사

    람들은 날마다 하루 동안 먹을 만큼의 만나만 모았습니다. 또 마태오복음 6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고 하느님께 양식을 청한다는 점에서 이 '양식'은 단순히 몸만을 위한 양식이 아니고

    영혼을 위한 양식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몸만 살아 있다고 해서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살아 있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

    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

    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란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다 자동적으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쪽에서 그 은혜를 받아들이려는 능동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

    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용서의 은혜도 우리 쪽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최종적으로 우리 것이 됩니다. 그 능동적인 노력이 바로 이웃을 용서하는 일

    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이

    미 베풀어주신 용서의 은혜를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웃을 용서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모든 이'란 글자 그대로 '모든 이'입니다. 용서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라는 기도는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

    문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 것이 되게 하려면 먼저 이웃

    을 용서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하느님께는 '죄'를 짓고, 사람끼리는 '잘못'을 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

    데, '잘못'이라는 말의 원문은 '빚'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문은 '우리에게 빚진 이

    를 모두 용서하오니'로 되어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빚을 모두 탕감

    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빚'은 잘못, 실수, 미움, 원한 등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일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죄' 라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께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뭔가 잘

    못한 일도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에 하느님께는 '죄'를 지은

    것이 되고 사람에게는 '잘못'을 한 것이 됩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라는 기도에서 '유혹'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

    련이나 박해를 뜻합니다. 즉 믿음을 버리고 싶게 만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포기하

    도록 만드는) 시련과 박해입니다. 그런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이 기도는 모든

    시련과 박해를 없애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련과 박해를 견뎌내고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은총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마태오복음 6장 13절에는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라는 기도가 더 있습니다. 루카는 이

    기도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라는 기도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생략한 것

    같습니다.

 

<5절-8절 :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5절-6절..(5)<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

    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내 벗

    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이 비유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당시의 여행자들은 한낮의 열기를 피하려고 밤에 여행을 하

    는 일이 흔했습니다. 지금의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밤늦게 찾아왔는데 마침 가

    진 빵이 없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마을에 있는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거나, 아니면

    아예 가게가 없는 시골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친구 집에 가서, 자는 사람을 깨워

    서 빵을 꾸어 달라고 사정합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먼 길을 여행 중인 나그네를 접대

    하는 일은 한밤중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빵을 꾸어 달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습니

    다. 여기서 '빵 세 개' 라는 말 자체에는 특별한 뜻이 없고 한 사람을 대접할 정도의 양을

    뜻합니다.

 

7절..<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당시

    그 지역에서는 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서는 이

    미 잠자리에 들었더라도 기꺼이 일어나서 빵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기 위해서 각색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친구가

    거절하는 것은 빵이 없어서도 아니고, 빵을 꾸어 주기 싫어서도 아닙니다. 자리에서 일어

    나기가 귀찮은 것입니다. 당시에 시골 농부의 집에서는 한 방에서 온 식구들이 함께 잠을

    잤습니다. 자다 말고 일어나는 것도 귀찮고, 이미 잠근 문을 다시 여는 것도 귀찮고, 함께

    자고 있는 아이들(식구들)이 잠에서 깨게 만드는 것도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모

    두 그에게는 '괴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8절..<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

    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끈질기게 간청하면 결국에는 빵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이 이야기는 기도할 때의

    태도에 대한 단순한 비유입니다. 벗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청을 들어주지 않겠지만 끈질기

    게 졸라대면 결국 청을 들어줄 것이라는 이야기는 현실 상황에서는 좀 부자연스러운 일입

    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끈질기게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끈질기게 청하면 결국 그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

    님께서 사람의 청을 안 들어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

    의 기도를 귀찮게 여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에는 하느님의 응답이 없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을 주신다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고, 인내하면서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엄숙하게 선언할 때의 관용어입니다. 그리고

    공동번역 성서는 이 구절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라고 의문문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은 의

    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9절-13절 :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9절-10절..(9)<"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

    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

    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

    은 엄숙하게 선언할 때의 관용어입니다. 여기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사실상

    같은 뜻의 말입니다. 즉 같은 뜻의 말을 표현만 바꿔서 반복한 것입니다.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사람은 결국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청하여라.' 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청하고, 하느님

    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는 말입니다.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을 청하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이나 다 청하라는 말도 아니고 개인의 이기적인 소원

    을 청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과 '청하는

    이는 받고' 라는 말은 누구나 하느님께 청하면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말입니다.

    '찾아라.' 라는 말은 하느님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회

    개'를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도'를 뜻하고 앞의 '청하여라.'와 같은 말입니다. 하느

    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이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라는 말과 '찾는 이는 얻고' 라는 말은 앞의 청하면 받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뜻

    으로 기도하면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문'은 하늘나라의 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청하고 찾는 것과 같은 뜻의 말

    로서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말씀은 기도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의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 청하지 않고, 찾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문을 두드

    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지금 예수님께서 강

    조하시는 것은 간절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11절-12절..(11)<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

    겠느냐?> (12)<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생선'과 '달걀'은 하느님께서 사람

    에게 주시는 은혜와 좋은 선물을 뜻합니다. '뱀'과 '전갈'은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고 속임

    수를 쓰거나 해치려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녀에게 그런 해로운 것을 줄 부모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13절..<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

    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녀

    에게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

    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런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확신) 속에서 꾸준히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영적인 선물, 영적인 은총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기도할 때에는 인내, 간절한 마음, 올바른 지향이 모두 필요합니다. 특히 지향에 대해서

    는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선을 주려고 하는데 뱀을 달라고 하고, 달걀을 주려고

    하는데 전갈을 달라고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시는데,

    우리가 해로운 것, 나쁜 것을 청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게 되는데, 우리가

    바라는 '돈, 건강, 출세, 승진, 합격, 당선...' 등이 과연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가장 좋은 것'인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좋은 것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좋은 것일 수도 있고, 하느님 보시기에도 안 좋은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하느님을 위한 기

    도,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로서의 기도를 바칠 줄 알아야 하고,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

    라 모두에게 좋은 것,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14절-23절 : 예수님과 베엘제불>

 

14절..<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

    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벙어리 마귀'란 자기가 사로잡은 사람을 벙

    어리로 만드는 마귀라는 뜻입니다. (마귀가 벙어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마귀

    를 쫓아내시자 말을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게 됩니

    다. 여기서 군중이 놀랐다는 것은 다른 기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

    하고 경탄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앞의 1장에서 '기쁜 소식'을 믿지 않은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지

    금 여기에서는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말을 못하게 된 사람이 나옵니다. 말을 못하게 되었

    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것도 됩니다. 우리는 마귀가 아니라 성령에게

    사로잡혀야 합니다. 성령에게 사로잡히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지만, 악령에게 사로잡히면 거짓 증언을 하거나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

    은 우리가 지금 어떤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어져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5절..<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

    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여기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마태오복음 12장

    24절에서는 바리사이들로 되어 있고, 마르코복음 3장 22절에서는 율법학자들로 되어 있

    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사람들은 대체로 놀라면서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

    는데,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의심하고 시비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은 열왕기 하권 1장 2절에 나오는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서

    온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마귀 두목의 이름으로 베엘제불과 사탄을 같이

    사용한 것 같습니다. 뒤의 18절을 보면 사탄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바

    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지 못하고 마귀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

    귀들을 쫓아낸다고 비방, 중상을 하고 있습니다.

 

16절..<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

    도 하였다.>--'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는

    것은 마귀를 쫓아낼 자격이나 권한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께서 마귀를 쫓아낸 것 자체를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

    했다는 말은 옛날 엘리야 예언자가 했던 것 같은 그런 기적,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한

    다든지(1열왕 18,38), 비를 내리게 한다든지(1열왕 18,45) 하는 그런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런 기적이 있어야 예수님을 인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17절..<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

    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는 것은 그들의 본심

    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본심이란 무조건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방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대로 기적을 행하셨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다른 이유를 대면서 또

    다른 요구를 했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라는 말은 왕국이 분

    열되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일반적인 이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다음 18절의 말

    씀을 하기 위해서 예를 든 것입니다.

    '집들도 무너진다.' 라는 말은 나라가 망하면 집들도 무너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

    고, 각 가정이 분열되면 그 가정이 파괴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문맥을 볼

    때 가정이 분열되면 그 가정이 파괴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18절..<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17절에서 일반적인 이치를 말씀하

    신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반박하십니다. 여기서 '사탄'은 마귀 두목의 이

    름이면서 동시에 마귀들의 왕국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이라는

    말은 '마귀들의 나라가 분열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라는 말은 마귀들의 나라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많

    은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만일에 그 일들이 마귀 두목의 힘으로 한 일이라면, 즉 마

    귀 두목이 예수님의 일에 협조해서 자기 부하들을 쫓아낸 것이라면, 그것은 곧 마귀들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살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라는 구절은

    앞의 15절에서 사람들이 했던 말을 예수님께서 다시 반복하신 것인데, 너희들의 말은 말

    도 안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반복하신 것입니다.

 

19절..<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

    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당시의 유대교에서도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3절에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대인'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에서 마귀

    들을 쫓아내는 일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예수님 당

    신이 마귀를 쫓아내는 것도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십

    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유대교에서 마귀들

    을 쫓아내는 일도 베엘제불의 힘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엘제불의 힘

    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유대인들 자신들이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

    들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너희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너희 유대교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라는 구절에서 '그들'은 유대인 구마자들을 가리키지

    만 사실상 '너희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여기서는 옳고 그른 일을 가리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말은 '바로 너희들 자신이 너희의 말

    이 그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19절의 예수님 말씀에는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구마 행위를 인정하시고 또 그 일이 하느

    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과 유대인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동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

    인들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마귀를 쫓아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

    아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마

    귀를 쫓아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과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이니 결코 동등한 일이 아닙니다.)

 

20절..<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하느님의 손가락'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뜻하는 말

    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이라는 말은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니' 라고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은 곧 하느님의 나라

    가 이미 사람들 사이에 와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따로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 구절은 유대교 구마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하

    느님의 나라가 와 있다는 표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1절..<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이 구절

    에서 '힘센 자'는 마귀를 뜻하고, '자기 저택'은 이 세상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

    시기 전까지 마귀는 세상의 임금으로 행세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마귀와 싸우기에는

    마귀들이 힘이 너무 강했습니다. '완전히 무장하고' 라는 말은 마귀의 강한 힘을 나타냅니

    다.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라는 말은 인간들이 마귀의 힘에 눌려서 무서워하고, 감히

    대항할 생각도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2절..<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더 힘센 자, 그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는 마귀입니

    다. '그가 의지하던 무장'은 마귀의 능력을 뜻합니다. '전리품'은 마귀를 쫓아낸 다음에 얻

    게 되는 평화, 안전, 하느님의 축복 등을 뜻합니다.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라는 말

    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후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축복을 나누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22절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일을 전투로 표현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보

    다 더 힘이 센 분이기 때문에 마귀를 이기고, 마귀를 무장 해제시키며, 마귀의 지배 아래

    에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킵니다.

 

23절..<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이 구절은 예수님과 사탄의 싸움은 아무도 중립을 지킬 수 없는 싸움이

    라는 뜻입니다. 그 싸움에서 인간은 구경꾼이 될 수도 없고 중립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편이 아니면 사탄 편입니다.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고, 예수님 편에 서지 않는 것은 곧 사탄 편에 서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반대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적대자가 된다는 뜻입니

    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사탄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라는 말은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을

    목자가 양떼를 모으는 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은 목자이신 예수님

    의 양떼에 속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양떼를 모으는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

    떼를 모아들이는 일을 구경만 하는 것은 사실상 양떼를 흩어 버리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

    다. 양떼를 흩어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박해하는 일, 또는 하느님의 백

    성을 박해하는 일과 같습니다. 이 말은 앞에서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이 구절에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마귀들 편에 선 것은 아니지만, 마귀들과 싸우는

    예수님 편을 들지 않고 뒤에서 비방과 중상을 하는 것은 사실상 마귀들 편에 선 것과 같

    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반역을 하지 않더라도 이적행위 자체가

    반역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앞의 9장 50절에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과 교회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교회를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9장 50절과 11장 23절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

    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면 이 두 구절은 사실상 같

    은 뜻의 구절인데, 9장 50절은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11장 23절은 부정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구절 모두 중립이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3장 16절에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뜨거운 것이 아니면 모두 차가운

    것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방관, 무관심 등은 악행으로 분류됩니다.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악행입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24절-26절 : 되돌아오는 악령>

    이 이야기는 마귀를 쫓아냈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쫓아낸 다음에

    는 성령으로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람 중에는 나중에 다시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이 이야기는

    유대인 구마자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만 할 뿐 그 다음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쫓겨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를 쫓아낸

    다음에는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복음으로 자기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24절..<"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

    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더러운 영이 사람에

    게서 나가면'이라는 말은 '악령이 사람에게서 쫓겨나면'이라는 뜻입니다. '쉴 데를 찾아'

    라는 말은 새로운 거처를 찾아다니는 것을 뜻합니다. '물 없는 곳'은 광야, 또는 사막을

    뜻합니다. 악령이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쫓겨났기 때문

    입니다. 쫓겨난 악령은 처음에는 사람들이 없는 광야를 떠돌아다닙니다.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라는 말은 광야나 사막은 인적을 찾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거처를 찾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선한 영이든 악한 영이든

    영은 인간의 몸을 거처로 삼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처를 찾지 못한 악령은 전에 있던 곳

    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나온 집'이란 자기가 전에 머물던 사람을 뜻합니다.

 

25절..<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악령이

    쫓겨났기 때문에 그곳은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악령이 머물던 동

    안에는 더럽고 어지럽혀진 상태였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깨끗해졌다는 것

    을 강조하는 구절이 아니라 다른 영이 들어와 있지 않은 상태를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즉

    악령이 쫓겨난 후에 그곳은 새로운 거주자가 없이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악령은 그곳

    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동료들을 더 불러들입니다.

 

26절..<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여기서 '자기보다 더 악한 영'이

    라는 말은 그다지 특별한 뜻이 있는 말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악령이 여

    덟으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 완성, 충만함을 뜻하는데, 일곱을

    넘어서 여덟이 되었다는 것은 가득 찬 것보다 더 많다는 뜻이고, 그것은 이제 그 악령을

    쫓아내는 일이 더 어렵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라는 말은 악령 들린 사람의 상황이 악령을 쫓아내기 전보다 더 악화되었음을 뜻합니다.

    (한 번 회개했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안 지으려는 노력과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회개했다고 방심하고 자만하면 더 큰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27절-28절 : 참행복>

    이 이야기는 앞에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중상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

    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

    르침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참 행복을 얻으려면, 즉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중상하지 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7절..<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

    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

    다.>--'이 말씀'은 앞의 17절-26절의 말씀을 가리킬 것입니다. 아마도 반대자들은 예수

    님 말씀을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 것 같습니다. 그 대신에 어떤 여자가 큰소리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찬양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예수님 말씀에 대한 찬양입니다.

    여기서 새번역 성경은 여자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른 것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그냥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배었던 모태와 당신에게 젖을 먹인 가슴'이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당신의 어머니'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표현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체의 일부로 인격을 가리키는 표현법을 흔히 사용했습니다.

    '행복합니다.' 라는 말은 '복되십니다.', 또는 '하느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자의 말은, '당신 같은 아들을 둔 어머니는 행복하다.' 라는 뜻일 수도 있고, '당신 같은

    아들을 둔 어머니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 말에는 '나도 당신 같은 아들을 가졌으면 좋겠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28절..<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

    다.">--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조금 수정하십니다. '오히려' 라는 말

    은 '그렇기도 하지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복되신 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한 분이시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참

    된 행복, 또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에 있다는 뜻

    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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