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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오늘 복음에서 궁금증이....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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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6-05-27 조회수1,857 추천수0 신고

 

제3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마르 11, 1~16, 8)

 

이제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은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목적지에 다다른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적수들의 처소이며 그분을 죽이는 장소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단 한 번 방문한 것으로 보고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지금까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움직여왔다면 앞으로는 정점을 향하여 내달릴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을 마치 사흘 동안에 일어난 것처럼 보도하고(11~13장), 예수님의 수난기(14~15장)와 부활사건(16, 1~8)을 전한다.

 

성지주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마지막 공생활을 기념하는 성주간의 여정을 마르코의 안내를 받으며 떠나보기로 하겠다.

 

 

V.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11, 1~12, 4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에 묵으시며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시고 날이 저물면 성밖으로 돌아오신다. 첫째날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두루 살피시고(11, 1~11), 둘째날에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셨다(11, 12~19). 셋째날에는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에 대해 설명하시고(11, 20~26), 성전 뜰에서 유다 지도자들과 긴 논쟁을 벌이셨으며(11, 27~12, 37) 몇 가지 훈시의 말씀을 곁들이신다.(12, 38~44)

 

 

1. 예루살렘 입성 (11 ,1~11)

 

해마다 성지주일에 기념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과연 역사적으로 어느 만큼 사실적인 사건이었을까? 예수님께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면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눈에 띄었음 직한데, 이 사건 자체에 대한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메시아의 행차의 빛 안에서 이해하려는 상징적이며 예언적인 서술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예, 곧 메시아로서 메시아의 왕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파견하여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를 가져 오게 하시는데, 과연 분부하신 말씀처럼 아무런 제재 없이 어린 나귀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왕권을 발동하여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는 것처럼(1사무 8, 11~18), 예수님께서는 새끼나귀를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주님이시고 앞일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분이시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 9; 참고 창세 49, 11)

 

즈카리야의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군주로서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실 겸손한 임금님이시다. 군중들은 임금님께서 행차하시는 길에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환호를 한다. 이스라엘의 임금 즉위식을 연상하는 장면이다.(참조 1열왕 1, 38~40; 2 열왕 9, 13)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9~10절)

 

군중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다윗의 왕정을 세우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 곧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면서 ‘호산나’라고 만세를 부른다.

 

‘호산나’란 말은 원래 유다인들이 순례 대축제일에 부른 소위 할렐시편(시편 113~118장) 가운데 나오는 일종의 청원기도로, “하느님 구원하소서” 또는 “하느님 도와주소서”(시편 118, 25)란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군중들의 환호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하늘나라 천사들도 “메시아 예수 만세!”하며 외친다. 이처럼 군중들의 환호성은 온 우주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기를 참으로 바랐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 곧 참된 왕직은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던 십자가상 죽음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실 바를 묵묵히 하실 뿐이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그 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베다니아로 돌아오신다.(11절) 이로써 다음날의 성전 정화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 [가톨릭신문, 2006년 9월 3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2. 무화과 나무와 성전 (마르 11, 12~25)

 

이틀째 되는 날, 성전 정화 사건이 일어나는데 사건 앞뒤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가 소개된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하느님께 맞갖은 경배의 장소가 되지 못하는 성전이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으로서 하느님 심판을 예고하시는 메시아로 드러난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12~14절)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경작되는 무화과, 올리브, 포도나무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작물로 성경 안에 종종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신 차에 무화과 열매를 기대하고 가까이 가셨는데, 잎사귀만 무성하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것을 보시고 저주를 내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독자들이 당혹스럽게 느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유일한 기적 이야기인데 왜 하필 자연물에 대한 저주이야기일까? 그것도 제 철도 아닌 때에 말이다.(13b절)

 

“포도나무에 포도가 하나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파리마저 말라 버릴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예레 8, 13; 참고 미카 7, 1)

 

아무래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약성경 말씀에 빗대어 하신 말씀이리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실망이 허기짐으로 나타나고, 제 때가 아니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회개의 시기를 놓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말라버리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 있는 위력을 갖고 계심을 상징한다.

 

성전을 정화하심 (15~19절)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고 믿었던 지극히 거룩한 처소로서 최상의 예배 장소였다. 그런데 온갖 상행위로 떠들썩한 모습과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모습은 옛 예언자의 질타를 떠올리게 한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이사 56, 7)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예레 7, 11)로 만들어 버렸다.”(17절)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혁명가이셨다느니 예수님께서도 폭력을 행사하셨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성전정화의 상징성을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성전정화가 이루어진 성전 마당, 이방인의 구역은 명실공히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된다. 세말에 가서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 되고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곳이 되리라는 예언자들의 말이 이루어진 것이다.(말라 3, 1~5; 즈가 14, 20~21) 예수님은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시는 메시아이시다.

 

성전의 주인으로서 권위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군중을 보고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두려움을 느끼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예수님께 성전 모독죄가 적용되어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마르 14, 58)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20~25절)

 

다시 이야기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신앙과 기도와 용서의 위력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된다. 각각 따로 전해져 오던 예수님의 토막 말씀(단절어) 셋(22b~23, 24절, 25절)이, 22b~23절과 24절은 ‘믿다’라는 동사로 연결되고, 24절과 25절은 ‘기도하다’는 동사로 연결되고, 25절에서는 ‘용서하다’는 동사로 연결되어, 신앙과 기도와 용서의‘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는 연쇄어 구문을 만들어 준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마음 속의 의심을 몰아내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기도는 이 신앙의 표현으로써,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며, 기도할 때만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위력으로 뿌리째 말라버리는 것처럼 하느님을 등지고 불신하는 이스라엘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9월 10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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