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을 읽고 이해하시는 데에 도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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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6-06-20 | 조회수1,974 | 추천수0 | 신고 |
성경을 읽고 이해하실 때 조금 쉬운 방법은 이렇습니다.
지금 현재 궁금하신 어떤 한 구절만 가지고 묵상하시는 것보다는
마태오복음 10장의 경우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박해를 각오해야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며 바로 이어서 버림과 따름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고 계시므로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텍스트와 버림과 따름을 말씀하시는 텍스트를 묶어서 살펴보시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평화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무찌를 수 있는 힘있는 통치자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그렇게 힘 있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자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런 평화를 주러 오지 않았다. 내가 주고자 하는 평화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평화를 누릴 수 있을 때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가 빛과 어둠을 가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창조의 질서가 잡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과정은 우선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육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때에 우리가 참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먼저 예수님을 더 사랑할 때에 부모님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행하려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과 이웃과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치관이 달라서 부딪칠 때에 바로 마태오복음 10장 37절에서 39절을 묵상해 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목숨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다음은 한님 성서 연구소의 답변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나 개인의 내적 평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평화는 개인의 안녕은 물론 공동체의 안녕도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따뜻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평화도 바로 이런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형제들에 대한 남김없는 봉사,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찾아주는 정의에 바탕을 둡니다. 이와 반면 지중해 연안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정된 상태를 부여했다는 '로마의 평화'는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 곧 무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잠정적 평화이자 안보 최우선의 유보적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고 하셨을 때의 평화는 바로 로마의 평화와 같은 거짓 평화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런 평화와 결별하시는 의미에서 '분열' 또는 '칼'(마태 10,34)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작년 청와대에서 열병식이 끝난 다음에 하신 연설에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라고 하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정태현 신부님의 답변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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