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성경 속의 여인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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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06-12 | 조회수3,621 | 추천수0 | |
[성경 속의 여인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티로는 이방인 지역이었다. 거기서 예수는 숨어지내길 원했다. 그럼에도 한 여인이 예수를 찾는다. 더러운 영에 휩싸인 딸의 문제로 예수를 찾은 그 여인은 이방인이었고 유다인들은 이방인 여인을 불결하고 저주받은 존재로 여긴 터였다. 유다인 남자인 예수는 여인을 두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예수의 말은 이랬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딸에 덮씌워진 마귀를 쫓아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을 향해 이런 삭막한 말을 던지다니.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의 주님이라 칭송받는 예수의 말인가 의아하다 못해 정나미마저 뚝 떨어진다.
예수는 ‘자녀’라는 말을 사용했다. ‘테크논(τέκνον)’, 곧 부모와의 혈연적 관계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다. 예수는 여인을 집 안, 혈연관계에서 벗어난 존재로 규정했다. ‘자녀’는 여인에게 배타적 메타포로 작동한다. 그러나 여인은 자녀를 다른 말, 곧 ‘자식'으로 받아친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자식’으로 번역된 ‘파이디온(παιδίον)’은 성인에 비해 나이나 키에 있어 작은 이를 일컫는다. 부지불식간에 예수의 ‘자녀’는 빵을 받는 이가 아니라 빵을 주는 ‘자식’으로 바뀐다. 여인이 그렇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여인은 예수가 설정한 가족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여인에게 빵이란 배타적 상징은 보편적 나눔의 출발점으로 기능하고야 만다.
더욱이 여인은 빵을 원한 게 아니다. 빵 부스러기를 원했다. 빵에서 부스러기로 이어지는 여인의 사유는 그 품이 넓다. 여인의 폭넓은 사유는 딸을 위한 필사적인 애잔함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제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혈연으로 굳건히 잠가진 저들만의 카르텔을 무너뜨린다. 흔히들 ‘강아지’를 언급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믿는 이의 겸손, 혹은 자기 낮춤을 언급하는 경우가 잦다. ‘강아지’까지 되어서라도 예수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반드시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여인의 결의가 달랑 겸손이라는 말마디 하나로 대체될 수 있을까. 겸손이 아니라 도전이며 저항이 아닐까. ‘자녀’로 대변되는 배타적이며 선민주의적 편견의 영역을 활짝 열어젖히는 구원에의 도전이며 저항이 아닐까 말이다. 불결하고 저주받았다는 이방인 여인의 과감한 도전을 예수 앞에 애원하는 겸손된 이의 처절함으로 규정할수록 우리는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에 대한 차별적 편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리라. ‘없는 이는, 아픈 이는 예수 앞에 빌어라. 그래야 너희들이 무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마초적 우월주의가 사회적 약자를 더욱 아프게 하기 마련이다.
예수가 여인을 위해 무언가 해준 게 아니다. 여인이 예수의 품을 넓혔다. 예수는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 ‘네가 그렇게 말하니…’, 그렇다! 여인이 그렇게 했다. ‘강아지’는 여인이 치유의 주체로,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자리다. 예수의 구원 방식은 늘 이랬다. 자신이 나서기 보다, 막히고 답답한 현실을 우리 인간이 스스로 나서서 헤쳐나가길 예수는 원했다.
어미의 마음은 자식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다른 아이의 아픔을 제 새끼의 아픔으로 보듬는가 보다. 세상 모든 아이가 제 새끼인 듯 아끼고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이 빵 부스러기에 담겨서 우리에게도 전해진다. 제 새끼만 경쟁에서 승리하는 영웅을 만들고자 편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지도자 층에게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염치를 가르친다. 함께 사는 세상에 저 혼자만 있지 않다는 염치. 그 염치의 시작은 예수가 아니라 한 여인의 용기 있는 도전에서 시작되었다.
[2022년 6월 12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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