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생활 속의 성경: 정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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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06-20 | 조회수3,596 | 추천수0 | |
[생활 속의 성경] 정오
파랗고 푸르른 하늘에 해가 똑바로 떠오른다. 빛은 어느 곳 하나 비워지지 않고 가득 들어차 파도치듯 넘실댄다. 지난밤, 생각의 어느 자리에 꺼무튀튀한 냄새를 풍기며 스멀스멀 피어났던 곰팡이들은 집중력을 붙들어 무엇인가를 이루고 실현해야만 하는 아침 시간에 그 자취를 하나둘씩 감추기 시작한다. 이내 해가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 숯덩이 같던 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빨아 옥상에 널어놓은 하얀 이불 홑청처럼 바싹 말라 가볍게 하늘거리며 사각거린다. 해는 밝고 온화하다. 그러나 뜨겁고 따갑다. 정오의 햇살을 도로 위에서 온몸으로 받아내 보면 알 수 있다. 쏘여진 빛이 입고 있는 옷의 겹겹을 뚫고 들어와 그대로 몸을 통과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그럴 것이다. 어두컴컴한 생각의 자리에 빛이 들어와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그러나 더더더 그 빛을 받아 가득히 채워 완벽하게 깨끗해지자고 계속 그 햇볕 아래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못한다. 더러워진 곳에서 깨끗해진 곳으로 옮겨가긴 쉽지만, 깨끗해진 그곳이 항상 깨끗해져 불순물 없는 성역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생활 속의 성경에서 하루의 시간을 다루기 시작하여 어느덧 네 번째 정오이다. 정오에 예수님이 다다른 곳은 ‘시카르’라는 사마리아 지방 동네였다(요한복음 4장 참조). 그리고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를 잡으신다.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빛줄기 아래를 걸으면서도, 신발을 끌면 어김없이 내뱉는 메마르고도 변덕스런 땅의 흙먼지 탓에 그분은 지치고 목마르셨을 것이다. 하느님도 털썩 주저앉을 수 있구나. 복음의 흔적이 있게 되는 자리면 어김없이 무성해지는 가라지 싹들 때문일까. 유다와 갈릴래아를 왕래하며 익숙했던 그 길이 오늘따라 더 길게 느껴지셨을 법하다.
같은 시각, 지치고 목마른 또 한 사람의 출연. 사마리아 여인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정오를 피해 더위가 가신 저녁 시간을 틈타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데, 이 여인은 보통의 경우와는 거리가 멀다. 해가 제일 강해 그 어느 순간보다 밝을 때를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으로 삼는다. 사방이 사람의 가지각색의 눈빛으로 번쩍이지 않는 때가 그에게는 가장 밝아 자유로운 시간이다.
두 사람이 우물에서 만난다. 이사악과 레베카가 우물에서 만났고(창세기 24장 참조), 야곱이 라헬을 우물에서 만났으며(창세기 29장 참조), 모세가 치포라를 우물에서 만났다(탈출기 2장 참조).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역시 우물에서 만난다. 사랑과 혼인의 장소인 우물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우물에서 긷는 ‘물’을 두고 오해를 거듭한다. 한 사람은 ‘물’을 마셔도 계속해서 목마르다고, 다른 한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아도 목마르지 않다고 말한다. 같은 ‘물’이라는 단어인데 이렇게 서로 달리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단어의 내용이 분명 서로 다르다. 어쩌면 ‘물’의 출처인 우물이 달라서일지도.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예수님은 사실 이율배반적이다. 자외선 차단제도 없이 직사광선 아래서 돌아가실 때 “목마르다”(요한 19,28)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눴던 정오의 시각에 사형을 선고받으신다(요한 19,14 참조). 털썩 주저앉게 한 그 피로감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걸까. ‘물’을 마시지 않아도 목마르지 않으셨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 두레박으로 뜬 ‘물’ 한 사발은 받아서 시원하게 마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건넸다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2022년 6월 19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노송동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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