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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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07-03 | 조회수3,396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1)
인생 전체를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이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성경 인물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을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물은 예수님의 조상으로 ‘사랑스러운 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다윗입니다.
다윗은 기원전 1040년경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 이사이의 아들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합니다. 어린 다윗은 목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사건이 생깁니다. 그의 나이 15세 때 사무엘 예언자를 만난 것입니다. 사무엘이 처음 본 다윗은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1사무 16,12)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7명이나 되는 형들을 제치고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이는 비록 지금 이스라엘에 사울이라는 왕이 있지만, 곧 다윗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는 예고이죠.
그런데 사무엘이 다윗에 앞서 외모가 출중한 맏형 엘리압을 보고 ‘이자는 왕이 될 상(相)이로구나’라고 생각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결국은 잘생긴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느님께 핀잔들은 사무엘은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의 불가해(不可解)를 강조하는 것은 신명기적 신학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로써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유를 드러내는 것이죠.
이후 다윗은 사울 왕의 궁중 악사로 지내게 됩니다. 다윗은 음악에 대단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우리의 성가와 같은 역할을 했는데, 어떻게 불렀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의 저자로 여겨져왔고,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 또한 많죠. 성경은 다윗의 음악이 악령을 퇴치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사무 16,23) [2022년 7월 3일(다해) 연중 제1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2)
다윗은 인생에서 두 번째 중요한 계기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기원전 12-11세기에 가나안 땅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필리스티아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입니다.
어느 날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양측 간의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골리앗이 등장합니다. 1사무 17,4은 골리앗이 갓 출신 투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거인족인 아낙인임을 암시합니다.(신명 9,2) 그리고 투사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중간에 서 있는 자’입니다. 다른 모든 이들을 때려눕히고 홀로 서 있다는 뜻으로, 직역하면 ‘승리자’가 됩니다. 키가 3m가 넘는(이것이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리스어 성경은 2m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이 중무장하고 나와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으며 이스라엘군을 도발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에는 기골이 장대한 골리앗을 감히 상대하려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군대를 이끌어야 할 왕인 사울조차 몹시 놀라 떨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40일이나 지속됩니다.(1사무 17,16) 40이라는 수는 시간이 가득찼음을 상징하여, 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40일이 지난 뒤 노아 방주의 문이 열렸고, 40일이 지난 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들고 시나이산에서 내려옵니다.
마찬가지로 40일이 지나자 어린 다윗이 전쟁터에 나타납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세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 이스라엘 진영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우연히 골리앗의 외침을 듣고는 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군대를 모욕하는데도 아무도 그와 상대하러 나서지 않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두려움에 떠는 이스라엘군과는 반대로 다윗은 하느님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큰형 엘리압은 동생의 분노를 애송이의 만용쯤으로 이해합니다. 사울도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다윗을 실전 경험도 없는 어린 소년이라는 이유로 출전을 불허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계속 사울을 설득하여 결국 허락을 얻어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무런 무장도 없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 들고 방패 든 자를 따로 데려올 정도로 중무장을 갖춘 골리앗을 마주합니다. [2022년 7월 10일(다해) 연중 제15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3)
골리앗이 다윗을 보더니, 무시하고 비웃습니다. 여기 ‘보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는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았을 때 사용된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골리앗을 마주한 다윗은 단호히 외칩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1사무 17,45.47)
골리앗은 다윗의 선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공격하기 위해 접근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무릿매(끈 달린 돌팔매)를 던져 골리앗의 신체 중에서 무장되지 않은 부분인 정수리를 명중시킵니다. 다윗이 무릿매로 던진 돌은 시속 약 200km 이상의 속도로 날아가 큰 덩치와 무거운 갑옷 때문에 움직임이 둔한 골리앗의 이마를 맞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충격을 받고 쓰러진 골리앗의 칼을 빼내어 그의 목을 베어 죽입니다. 만일 골리앗이 다윗을 저주할 때(1사무 17,43) 다곤 신의 이름을 불렀다면, 그는 자기가 믿는 우상과 같은 운명을 겪은 것입니다. 1사무 5장은 계약의 궤 앞에 있던 다곤 신상의 머리가 잘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분투에 사기가 크게 오른 이스라엘군은 필리스티아인들을 물리칩니다. 이 일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고, 단번에 자신의 이름을 온 나라에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공을 인정받아 이스라엘의 국방부 장관이 되었으며 사울 왕의 아들 요나탄과 우정을 나누고 딸 미칼과 혼인도 하게 됩니다.
행복한 시간이 지속되는 듯했지만, 다윗은 치솟는 자신의 인기를 시기한 사울 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요나탄과 미칼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는 신세가 됩니다. 사실 이것은 사울이 군사들 앞에서 골리앗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2022년 7월 17일(다해)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4)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을 이렇게 칭송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1사무 18,7)
백성의 민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윗을 제거하려 합니다. 역사가 보여주듯 자기보다 뛰어난 신하를 둔 임금이 종종 저지르는 잘못이죠. 더구나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출신인 사울은 다윗의 배경이 강력한 지파 중 하나인 유다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위기에 처한 다윗을 위해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느님은 먼저 가드 예언자를 통해 다윗을 고향 유다 지방으로 보냅니다. 다윗은 그곳을 기반으로 사울에 맞서 싸웁니다.
그런데 다윗의 군대는 특이합니다: 곤경에 빠진 이들, 빚진 이들, 그 밖에 불만에 찬 사람들이 모두 다윗에게 모여들었다.(1사무 22,2) 다윗의 왕국은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만든 나라입니다. 다윗의 군세는 사울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엔 게디에 숨어있는 자신을 쫓아온 사울을 오히려 죽일뻔한 것입니다.
엔 게디는 ‘들염소의 샘’이라는 뜻인데, 황량한 광야 한가운데 샘이 솟고 있어 주변의 들염소들이 물을 마시러 모이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지역의 지형은 절벽과 암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곳곳에 동굴이 뚫려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사울이 볼일을 보러 들어간 동굴이 하필이면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던 곳이었습니다. 부하들이 하느님께서 사울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신 것으로 생각할만합니다(1사무 24,5). 당연히 다윗은 무방비 상태로 혼자 있는 사울을 쉽게 죽일 수 있었겠죠.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자르고 그를 살려줍니다. 다윗의 의도가 어떠하든, 이 행위는 왕권의 교체를 상징합니다. 이전에 사울이 옷자락을 찢었을 때, 사무엘은 이렇게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왕국을 임금님에게서 찢어 내시어, 임금님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주셨습니다.”(1사무 15,28)
원수를 은혜로 갚은 다윗에게 감동한 사울은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갔음을 인정하고 돌아갑니다. [2022년 7월 24일(다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5)
왕권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던 사울은 마음을 바꿔 다시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두 번이나 다윗에게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다윗은 하느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습니다. 결국 최종적인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울이 절망에 빠져 길보아 산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납니다.
2역대 10,13-14은 사울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배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었다. 그는 주님의 분부를 따르지 않아 주님을 배신하고, 영매를 찾아 문의하면서도, 주님께는 문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그를 죽게 하시고 이사이의 아들 다윗에게 나라를 넘겨주셨다.” 사울의 죽음은 다윗 탓이 아니라 본인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런데 즉시 이스라엘 전체의 통치권을 갖지는 못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 보셋 또한 왕이 되어 왕국이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 보셋은 1역대 8,33의 에스바알과 같은 인물입니다. 신명기계 역사서는 역대기계 역사서에서 우상인 바알이 들어간 이름을 보셋(수치스러움)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다윗과 이스 보셋의 전쟁은 2년간 지속됩니다. 비록 그 수가 적었지만, 오랜 기간 전쟁으로 단련된 다윗의 군대는 이스 보셋의 군대를 압도합니다. 결국 이스 보셋이 패배를 직감하고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위해 배신한 부하 장수들의 손에 목이 잘린 후에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된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는데, 바로 오늘날의 예루살렘입니다.
다윗은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는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계약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던 중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들이 나콘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였다. 소들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우짜가 손을 뻗어 하느님의 궤를 붙들었다. 그러자 우짜를 향하여 주님의 분노가 타올랐다. 하느님께서 그의 잘못 때문에 거기에서 그를 치시니, 그는 거기 하느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2사무 6,6) [2022년 7월 31일(다해) 연중 제18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6)
우짜의 죽음은 현대 독자들뿐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도 문제였습니다. 하느님을 도우려고 한 결과가 죽음이라니 어이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해석 하나는 우짜가 죽은 것은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다 고대 역사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우짜는 사제가 아니었는데도 감히 계약의 궤에 손을 대었기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도 있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의 이름을 페레츠 우짜라고 지었는데(2사무 6,8), ‘우짜의 위반’이라는 뜻입니다.
현대의 해석 하나를 소개하자면, 우짜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의 궤를 그냥 단순한 상자처럼 여겼기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궤는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승리하여 전리품으로 취했을 때도 필리스티아에 재앙을 일으켜 스스로 이스라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1사무 5,9-11) 그러니 궤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충분히 있었고, 만일 수레에서 떨어졌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하느님의 뜻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짜는 하느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분의 뜻을 가로막으려 했으니 죽었다는 해석입니다.
기쁨의 춤을 추며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신 다윗은 하느님께 성전 건축을 하겠다고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그 사업은 아들 솔로몬에게로 넘겨집니다.
그런데 2사무 7장의 본문만 보면 왜 하느님께서 다윗을 성전 건축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1역대 22,8에 나옵니다: “너는 사람의 피를 많이 흘리고 큰 전쟁들을 벌였으므로, 내 이름을 위한 집을 짓지 못한다.” 이에 따르면 다윗은 흠이 있어 성전 건축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전승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왕권 때문에 일어난 전쟁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나안 토착민들을 상대로 두 번의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벌이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게 됩니다. 이로써 다윗은 이스라엘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킵니다. [2022년 8월 7일(다해) 연중 제19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7)
전쟁에서 수많은 피를 흘린 다윗이 살인하지 말라는 제5계명을 어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살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짜’는 구약성경에 46번 나오는데, 의도적인 살인과 실수로 한 살인 모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하지만 ‘라짜’는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과 자기방어를 위해 살인을 하는 것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성전 건축을 할 수 없었던 것은, 피를 흘리는 것은 피하지 못할 상황이거나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해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성전 건축에는 피에 물든 다윗보다 평화의 임금 솔로몬(이 이름은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에서 유래했습니다)이 적합한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사울에게 그러하셨듯이 다윗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7장에 여러 번 나오는 히브리어 ‘바이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트’는 집, 왕궁, 성전, 가정, 부족, 국가, 왕조 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를 따라가 보면, 7장에서 다윗은 하느님의 집(성전)을 짓고 싶다고 하는데, 오히려 하느님께서 다윗의 집(왕조)을 지어주겠다고 하십니다. 비록 다윗이 성전 건축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집안을 영원히 굳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2사무 7,16)
이렇게 본다면 7장은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큰 호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다윗은 그 이름의 뜻 ‘사랑받는 자’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이스라엘의 절대자가 된 다윗은 심각한 죄를 짓게 됩니다. 바로 기원전 990년경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던 히타이트 용병 우리야를 그의 아내 밧 세바를 취하기 위해 죽인 일입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밧 세바는 귀족 가문 출신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된 것과 왕궁 가까이에 집이 있던 것, 왕에게 사람을 보낼 수 있던 것, 다윗이 그들 사이의 일을 감추려고 한 것 등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2022년 8월 14일(다해) 연중 제20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8)
성경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지만, 다윗과 밧 세바의 결합을 정략결혼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밧 세바를 선택한 이유를 이미 기원전 19세기부터 철기 문명을 누리고 있던 히타이트족 유력 가문과의 결속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청동기 시대에 머물러 있어서 철제 무기로 무장한 필리티스아인들과의 싸움에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윗은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죽이면서까지 철기 제작 기술을 보유한 가문의 밧 세바와 결혼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밧 세바가 다윗의 여덟 번째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게비라’(공식적인 황태후)라고 불린 까닭도 이렇게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솔로몬이 장자 승계권이 중시되던 이스라엘에서 형들을 제치고 왕이 된 이유도 철기 문명의 계승자이기 때문으로 봅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주장은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는데, 고고학은 실제로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에서 철제 무기와 농기구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음을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다윗과 밧 세바의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목욕하는 밧 세바를 우연히 보고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눈에 반한 다윗이 그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죽게 만들고 결국 아내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 사건을 명백히 다윗의 음욕에서 비롯된 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일생 전체에서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일입니다.
1열왕 15,5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 사건 말고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만 하였으며, 살아있는 동안 내내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
사실 이 표현은 과장된 것입니다. 다윗의 잘못은 이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밧 세바는 오랫동안 다윗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이 사건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해석되어왔습니다. 다윗의 잘못을 희석하기 위한 것이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밧 세바를 이 사건의 공범을 넘어 주범으로까지 몰아갔습니다. [2022년 8월 21일(다해) 연중 제2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9)
여러 주석가는 적어도 밧 세바가 다윗의 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다윗을 유혹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많은 미술 작품들도 밧 세바의 목욕 장면을 선정적으로 그렸습니다. 다윗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목욕한 것도 부주의가 아니면 의도적이었을 것이고, 다윗이 불렀을 때 강압했다는 기록도 없는데 밧 세바는 순순히 따라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임신하자마자 다윗에게 긴급하게 알린 것도 다윗과의 관계를 하룻밤으로 끝내지 않고 그를 붙잡으려는 행위로 이해했습니다. 남편 우리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도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밧 세바를 다른 관점에서 이해했으면 합니다. 많은 이들이 밧 세바의 목욕을 다윗을 유혹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정적 행위로 보았지만, 2사무 11,4은 그 목욕이 월경을 끝낸 다음에 하는 정화를 위한 의식적인 목욕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정기적인 목욕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이 구절의 ‘데려오다’라는 동사는 밧 세바가 자신의 의지로 다윗을 만난 것이 아니라 왕의 권력에 의해 이끌려갔음을 증언합니다. 이를 위해 밧 세바가 처해있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2사무 11,3에서 밧 세바는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아버지와 남편에 종속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근동의 모든 여인이 그러했듯이 밧 세바 또한 남성 앞에서 수동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밧 세바가 감히 가장 강한 남성인 왕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과 밤을 보낸 뒤에 밧 세바는 화려한 왕궁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밧 세바의 꿈이 출세에 있지 않고 자신의 가정에 있음을 말합니다.
2사무 12,4의 나탄의 비유에서도 밧 세바의 죄는 논해지지 않고 다윗의 죄만이 언급됩니다. 밧 세바는 오히려 빼앗긴 암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밧 세바는 남편 우리야를 사랑했습니다. 2사무 11,26에서 밧 세바가 우리야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할 때 매우 강한 감정적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의 슬픔이 컸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애도에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제라도 밧 세바가 명예를 회복했으면 합니다. [2022년 8월 28일(다해) 연중 제2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10)
다윗은 이 일로 예언자 나탄을 통한 하느님의 질책을 받고 뉘우쳤으나, 얼마 뒤 또다시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을 합니다. 기원전 973년경 인구 조사를 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죄는 이스라엘에 흑사병을 불러와 7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인구 조사는 보통 조세나 징병을 위해 실시되는데, 구약성경은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불신하고 인간의 금력이나 무력을 믿거나 과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수기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명에 따른 인구 조사는 괜찮은 일이었습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도 이 상황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이것이 죄가 되었을까요?
(주님께서) 다윗을 부추기시며 말씀하셨다.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 (2사무 24,1)
사탄이 이스라엘을 거슬러 일어나,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도록 다윗을 부추겼다. (1역대 21,1)
동일한 사건에 대한 두 기록이 다르죠.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역대기는 인구 조사 자체가 악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고, 사무엘기는 다윗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는 하느님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2사무 24,10)
다윗의 이 고백은 하느님의 교육이 필요했음을 증명합니다. 자신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하느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다윗이 가나안 땅을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모두 정복한 이스라엘의 전성기였습니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다윗과 백성 안에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자신들의 금력과 무력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인구 조사를 통해 표출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명하시기 전에 이미 인구 조사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인구 조사는 단순히 하느님의 명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윗의 마음속 죄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2022년 9월 4일(다해) 연중 제23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다윗 (11)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열정에 불탔습니다. 어린 소년에 불과한 그였지만 살아계신 하느님의 군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던 골리앗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린아이의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두 번이나 사로잡았음에도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았다는 이유로 놓아줄 정도로 하느님을 경외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철저히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이 된 뒤 권력에 취해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큰 죄를 두 번이나 짓게 됩니다. 첫 번째는 고향을 떠나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던 충실한 히타이트 용병 우리야를, 그의 아내 밧 세바를 차지하기 위해 비열한 수를 써서 전장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금력과 무력을 드러내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번영이 하느님이 아니라 다윗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인 양 착각한 것이고, 하느님보다 금력과 무력을 더 신뢰하게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치고 죄를 짓지 않는 자 드물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타의 권력자들과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대개 권력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충신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거나 아니면 역사를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탄 예언자와 가드 예언자가 와서 자신의 두 번의 잘못을 꾸짖었을 때 즉시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바로 이 회개로 인해 다윗은 그의 큰 죄들에도 불구하고 멸망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인접 국가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위상을 드높이고 아들 솔로몬에게 무사히 왕위를 넘긴 뒤 기원전 970년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성왕(聖王)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다윗이 거룩한 임금인 이유는 그의 삶에 한점 흠도 티도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리 큰 죄에도 결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하는 회개의 위대함을 보여 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2022년 9월 11일(다해) 연중 제2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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