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웃 종교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 / 송용민 신부님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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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6-11-09 | 조회수2,432 | 추천수0 | 신고 |
이웃 종교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 나는 어떻게 내 신념을 지키는가? "나는 어떻게 내 신념을 지키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남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내 소신이 옳다는 확신을 포기하지 않는 길, 둘째는 내 신념을 절대화해서 다른 신념의 잘못을 지적하고 배타적으로 반대하는 방법, 셋째는 내 신념이 상대적인 것임을 인정하고 다른 신념의 좋은 점을 발견하면 내 신념과 적당히 섞어서 타 협하며 사는 것. 이 세 가지는 신념을 지킨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지만 첫째 방법은 맹신 과 광신이 될 수 있고, 둘째 방법은 독선과 폭력을 낳을 수 있으며, 셋째 방법은 혼란과 모호함에 빠질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종교인들이 타 종교인들을 향하는 태도와 연관된다. 내 종교가 갖는 확실성 이 타 종교인들을 향하는 태도와 연관된다. 내 종교가 갖는 확실성의 기준을 보편적 이성 이 아닌, 감성과 주관적 체험에 둘 경우 주관주의나 광신주의에 빠질 수 있고, 내 종교적 신념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내세울 경우 타 종교인의 신념을 우상으로 몰아세우고 박해하 는 배타적 근본주의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내 종교와 다른 종교들이 같은 진리를 다르게 말할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구미에 맞는 교리나 윤리적 계명을 선택적으로 지키는 종교혼합이나 종교다원주의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이런 태도와는 무관하게 종교에 대해 관심이 아예 없거나, 종교를 세속적 관심의 도 구쯤으로 삼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타 종교에 대한 무관심의 정도는 더 클 수도 있다.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왜 석가탄신일에 부처님 탄생을 함께 축하해야 하는지 의 아해하고, 불교 사찰을 방문하거나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불교와 대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가톨릭 신자로 사는 것을 가 장 훌륭한 종교적 선택이라고 믿으면서, 가톨릭 신앙 이외에 다른 종교들은 하급 종교이거 나 하느님의 진리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2급 신앙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가톨릭교회가 타 종교를 대하는 진정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가톨 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교회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자비에 토대를 둔 '하느님 백성'으로 규정하고, 타 종교가 지닌 옳고 성스러운 것을 그리스도의 '복 음의 준비'(「교회헌장」 16항)로 받아들인다. 또한 '타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비그리스도교 선언」2항)할 것을 선언한 바 있다. 종교인 상호 간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가톨릭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에 따라 자비의 특별 희면(2015년 12월 8일 -2016년 11월 20일) 기간에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성'인 하느님의 자비를 깨 닫고, 모두가 자비의 선교사로 나설 것을 요청했다. 하느님의 자비는 제도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그 힘을 발휘"(「자비의 얼굴」23항)한다. 교회란 제도이기 이전에, 성령의 부르심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려 모인 신앙 공동체 이며, 하느님 백성에는 세례성사를 통해 명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느 그리스도인 외에도, 구약성경의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간직하며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유다인과,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이슬람교인(모슬렘)도 포함되고, 심지어 "진실한 마음으 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에 따라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 려고 노력하는 사람"(「교회헌장」16항)들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자비의 희년에 교황님은 우리와 종교적 신념이 다르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실천하는 '비그리스도인', '타 종교인'에 대한 존중과 활발한 대화도 요청하셨다. 최근 종교적 신념을 빌미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부 근본주의자들의 만용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타 종교인들에 대한 자비가 어떤 의미인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종교 간 대화에 오랫동안 학문적 관심을 갖고 참여해 왔다. 특히 한국의 대종교인 불 교와 유교는 물론 민족종교인 원불교와 한국 종교심성의 기층인 민간신앙 또는 무巫의 정신 을 깊이 연구해 왔다. 학문적인 관심에서 시작한 종교인들과의 만남이었지만, 사실 오랜 시 간 그들과 함께 만나면서 얻은 결실은, 종교의 교리가 아닌, 종교인의 실천적 삶이 지닌 매력 이었다. 스님을 만나면 불교의 철학적 교리의 난해함보다는, 독신으로 살면서 수행과 보시의 삶을 사는 해맑은 미소를 보고, 사찰에 들어서면 불교의 표징들이 갖고 있는 심오한 뜻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유학자들을 만나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뿌리 깊게 남겨진 '인의예지' 의 친근함을 만나고, 원불교 교무들을 만나면 그들의 가난함과 소박함, 실천적 불교 정신을 살아가는 수행자의 모습을 본다. 종교 간의 대화는 교리를 비교하기보다 종교인 간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 '삶은 서로를 이어주지만, 교리는 서로를 갈라놓는다'는 말처럼, 종교적 삶은 사람들이 욕망 을 벗어버리고, 자기 존재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타인을 비난하고 배척하기에 앞서, 자기 수행과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향하게 해주는 영적인 혜안의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는 살아 움직이신다 필자는 자비의 희년을 지내명서 하느님 자비가 타 종교인을 향할 때 '용서와 관대함', '존중 과 인내'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톨릭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갈등을 겪어 온 이웃 종교인, 그 가운데 하느님의 축복과 계약을 간직하고 우리와 구약성경의 신앙유산을 공유해 온 유다인에 대한 존중, 같은 하느님을 섬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기도와 자선, 단식 을 실천해온 이슬람 신자(모슬렘)와의 대화, 불교의 수행정신과 무소유의 삶의 가치, 유교의 인륜과 도덕적 가치의 존중은 물론, 토착 종교들이 보여주는 신성을 향한 인간의 겸허함 속 에서 성령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넓은 마음, 보편적인 사랑을 마음에 담 고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확신은 내 속 좁은 마음에 다 담지 못하는 하 느님의 자비의 넓이를 다른 종교인들 안에서도 발견하도록 초대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 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종교인들 안에서도 살아 움직이시며, 그들의 고유 한 문화와 신념 안에서도 당신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명시적 인 신앙의 교리가 다르고, 믿음의 체계가 달라도, 하느님의 진리는 이웃 종교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들 종교와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 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지닌 보편성의 위대함을 이웃 종교와 비교하는 식으로 상대화해서 냉대하거나, 내 종교적 확신을 다른 이들에게 무조건 강요하는 독선을 피해야 한다. 신앙은 체험을 통한 증언이다. 이 증언은 내 인생에 보여주신 하느님의 엄청난 자비를 증거 함으로서 이웃 종교인들과 내적 체험을 나눌 수 있게 해주며, 아직 확신에 찬 하느님 체험을 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참된 종교의 맛을 전하는 선교의 노력으로 이어지는 힘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결코 나의 죄만 용서하시고 내가 필요할 때만 도움을 받는 이기적 욕망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저마다 고유한 문화와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이웃 종교인들이 깨 달은 진리의 빛을 식별하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일치와 화해, 평화와 자유의 길을 이들과 함 께 걷는 것이야말로, 자비의 희년을 마치며 우리가 다시 자비의 선교사로 이웃 종교인들과 공존하는 길을 택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송용민 신부 ㅣ 주교회의 사무국장,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야곱의 우물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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