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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의 삶(퍼옴)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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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6-11-24 조회수4,341 추천수0

 

대림의 삶

 

 


01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

 

교회는 매년 대림시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실제로 메시아를 기다린다. 신자들은 구세주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한 오랜 준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새롭게 한다. 교회는 선구자’(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순교를 기념하여 그의 소망과 일치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524) 한편, 예수님께서는 설교 중 당신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동시에 일어날 마지막 날의 심판을 예고하셨다. “그때에는 각자의 행동과 마음속의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고의적 불신이 단죄받을 것이다. 이웃에 대한 태도에서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거부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678; 마태 25,40)

 

 

재림(再臨)의 어원인 라틴어 Parusia(파루시아)

세상 마지막 날에 최후 심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을 의미하는 용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시고 다스리시기 위해

주님께서 곧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한다.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선한 행실과 금욕적인 공동체 생활로 그날의 심판에 대비하는데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주님은 오시질 않고

초조해진 제자들은 생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차근차근 다시 기억해 보기 시작한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36-44)

 

이렇게 재림의 당도는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미공개로 남아 있음을 깨달은 제자들

재림의 의미를 심도 있게 재해석해 다다른 결론은

 

재림 때 일어날 현상과 그 시간을 궁금해 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에서 생활의 회개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종말을 기다리는 맞갖은 삶으로 깨어 있는 신앙을 간직하자!

 

결국, 초대교회 신자들은 초초함을

점차 희망으로 승화시켜 가고

 

재림과 심판은 단지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날

비로소 완성될 것임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미아직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더욱 생명력 있게 만들고

종말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의 희망을 세상에 드러낸다.

 

 

 

 

01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

 

 

깨어 기다린다는 것

 

재림(parusia)은 세상 마지막 날에 최후심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을 의미하는 용어다. 비록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지만’(사도 1,7) 승천 이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임박해 있다. 이 종말론적 사건과 그에 앞서 닥칠 마지막 시련은 비록 유보되어 있기는 해도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673)

 

순례하는 지상 교회는 이미실현된 구원과, 아울러 세상 끝 날 구세주요 심판자로 다시 오시어 구원을 완성하는 때까지 아직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아직다가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며 기다릴 것인가? 현세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있어 대림재림의 의미는 깨어 기다림맞갖은 준비의 자세를 일깨워 주고 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는 복음에 충실하고, 참을성 있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맞갖은 준비는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축복을 온전히 받기 위해 보속, 속죄, 자선, 검소한 생활, 자기절제와 희생, 봉헌 등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기다린 주님의 날

 

구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중내림’(二重來臨), 첫 번째 오심’(강생)두 번째 오심’(再臨)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하느님의 오심을 언급하는 구절이 여러 번 등장한다. 하느님께서 오시는 주님의 날에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처벌될 것이고, 반대로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것이다. 따라서 죄인들에게 이날은 두려움의 날이고(아모 5,18-20; 예레 23,19), 선인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의 날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약의 하느님 백성은 희망을 가지고 주님의 날을 기다렸는데, 이 평화의 실현이 다니엘서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때에 오실 종말론적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다. 묵시문학적 사고에 의하면 심판의 날에 하느님을 대신해 오실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언급한 다니엘서 7장은 공관 복음서가 언급하는 사람의 아들 개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약시대 재림의 임박설과 지연 문제

 

재림에 대해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부분들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초대교회 공동체가 만든 말인지를 구별하기 어렵지만, 개념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공관 복음서의 재림(마태 24-25; 마르 13; 루카 21)은 예수님께 사람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원자인 동시에 심판자로서의 모습을 적용하고 있다.

공관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 재림할 때 있을 여러 현상들을 공통적으로 소개한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을 갖추고 오며, 재림이 있기 전에는 여러 가지 우주적 징조가 나타난다. 이후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할 것이다(마태 25,31-33). 공관 복음은 재림이 곧 당도할 것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 임박한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공개된 개념으로 남겨 둔다. 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사람의 아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이 알고 계신다(마태 24,36).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든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하신다(마태 25,1-13; 마르 13,32 ‘열 처녀의 비유).

 

마르코 복음사가에 의하면

재림은 매우 임박한 사건으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질 사건이었다(마르 13,28-31). 그러므로 그보다 앞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소개하고 있는데, 만민을 위한 복음 선포가 그것이다(마르 13,10). 이는 재림의 지연 문제를 선교라는 주제로 해석하고, 그 긴박성을 해소하려는 마르코의 신학적 성찰의 결과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재림의 지연 문제(마태 24,48)를 늘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사목적 경고를 통해 완화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만 언급하는 최후 심판’(마태 25,31-46)은 이 심판이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정의구현 여부가 심판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종말 개념을 보다 현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사도 1,1) 이라고 승천과 재림의 동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재림을 구세사적 역사관에 입각해 해석한다. 즉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은 파괴와 소멸로 인한 다른 세상의 도래가 아니라 일종의 복원으로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종말 사건은 현 세상의 파괴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완성이며 창조 사건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의 재림(요한 14,3)과 부활, 심판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이러한 요한의 종말론적 희망은 이미 부활했고(요한 11,25-26) 심판도 받은(요한 3,19)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원한 생명(요한 3,15)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현대 신학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현재적 종말론을 들고 있다. 즉 주님이 오시는 그날은 매일의 삶 속에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개인의 신앙적 결단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 보시는 분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시다. 아들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총을 거절한 사람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며, 각자가 한 일에 따라 받을 뿐 아니라, 사랑의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678)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 및 행위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역사 가운데에서 그리고 인간 역사의 종말에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구약에서 심판의 기준은 율법이었지만, 신약에서는 복음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최후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로마 8,1 참조).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에 의하면 하느님은 온 세상의 재판관이시다. 또한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므로 만물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그의 재판은 제한이 없으며, 선과 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으로서 선과 악 사이의 분별에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창세 2,17; 3,4; 1열왕 3,9). 나아가 하느님은 겉모양뿐만 아니라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 보시는 분으로서, 사람의 가슴속 은밀한 생각까지도 모두 꿰뚫어 보신다(22,13; 예레 11,20; 로마 2,16 참조).

 

한편, 유배 이후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결정적인 구원에 앞서 모든 죄인과 하느님을 대적하는 원수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주님의 날로 일컬어지는 이날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다(이사 66,8). 그러나 사실상 최후의 심판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행위는 하늘의 책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공과에 따라 심판받기 때문이다. 이때 의인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겠지만 죄인들에게는 공포의 날이 될 것이다(아모 5,18-20; 지혜 4,15-16).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느님이 개입하시어 악인들을 단죄하는 심판의 날, 주님의 날’(1코린 1,8)이라 생각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심판하실 날인 재림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기에(임박한 재림사상), 선한 삶을 살아야 하고 악을 행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그들은 이를 되새기기 위해 주일마다 공동체와 더불어 성찬례를 거행하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신앙을 고백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분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행위에 셈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육화한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요한 3,17; 8,16). 비록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 각자는 그분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 결국 심판이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판결이라기보다는 자비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온 삶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은 각자의 마음속 깊이 이미 이루어진 판가름을 환하게 드러낼 뿐이다.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재림할 것이며,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고, 모든 나라들은 그 앞에 불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양을 염소와 구분하듯이 그들을 갈라놓을 것이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던져질 것이다. 결국, 얼마나 사랑했느냐가 심판대에서 판가름의기준이 된다.

 

 

사심판과 공심판

 

사심판은 개별심판이라고도 하며, 사망 직후 하느님께 받는 심판을 말한다. 공심판은 최후심판이라고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지는 심판을 말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의하면 각 사람은 죽자마자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셈 바치는 개별심판으로 그 불멸의 영혼 안에서 영원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러한 대가는 정화를 거치거나, 곧바로 하늘의 행복으로 들어가거나, 곧바로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1022)

 

또한 공심판인 최후심판을 통해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각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상이 결정적으로 밝혀질 것이며, “각 사람이 지상생활 동안 선을 행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궁극적 결과까지도 드러날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전체에 대한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하여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며,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1039-1040) 이러한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날에’(2코린 6,2)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촉구하며,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희망‘(티토 2,13)을 알리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1041)

 




02 희망에 찬 종말을 고대함

 

종말에는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 후에 육체와 영혼이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며 우주 자체도 새롭게 될 것이다. 온 교회는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인간과 밀접히 결합되어 인간을 통하여 그 목적에 이르는 온 세상도 인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이다. 인류와 세상을 변화시킬 이 신비로운 새로움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에페 1,10) 하느님 계획의 결정적 실현이 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1042-1043)

 

 

천국(天國) 하느님이 계신 천상의 나라

연옥(煉獄) 죄의 정화를 위한 불의 단련소

지옥(地獄) 불과 용암이 뒤덮인 땅속 감옥

 

인간은 죽은 다음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을 받아

죄 없는 천국으로

용서받을 죄를 사함 받지 못한 자는 연옥으로

죽을죄를 저지른 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쳤던 전통적인 종말교리.

 

그러나 과거의 종말론은

전통적 종말교리에 대한 경직된 해석의 위험에 놓이는데

, 종말적 실재들의 사후(死後) 공간 개념을 강조한 나머지

신앙인의 현세 삶을 경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종말신앙을 새롭게 해석하는데

, 천국과 지옥은 최후의 날에 찾아오는 실재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삶 안에서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곳이 바로 천국이며

사랑이 사라져 미움만 남은 곳이 바로 지옥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

 

예수님이 가르치신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실재의 상황을 미리 알리는 점쟁이 같은 방식이 아니다.

신앙인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알리는 희망의 비유.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02 희망에 찬 종말을 고대함

 

 

하느님의 변치 않는 약속과 사랑

 

구약의 종말사상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약속에서 오는 희망에 의해 그 근간이 형성된다. 성조시대에는 후손과 풍요로운 땅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창세 15). 초기 왕정시대에 들어와서 민족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발람의 신탁(민수 23-24)과 야곱의 축복(창세 49) 그리고 모세의 축복(신명 33)에서 발견된다. 이들 신탁은 하느님의 약속이 다윗과 그 후손에게서 완성된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중적 믿음을 반영한다. 여기서 이미 메시아에 대한 신앙의 전조들이 나타난다. 초기 예언자인 아모스의 종말사상에서는 저주의 예언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선택된 백성을 고발하였다(아모 3,2). 그러나 아모스는 약속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견지하였다(아모 5,4-6. 14-15).

 

호세아 예언자도 이스라엘에 대한 재난을 선포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하느님 사랑의 선택에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과 우둔함에 내려질 처벌과 회복의 날이 임박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의 기초다. 그러나 호세아의 관심사에는 정치적 상황의 예고나 엄격한 인과응보보다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배은망덕과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종말론적 예언은 다가올 심판의 양면성에 대해 가르친다. 특히 그가 강조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이사 1,9; 10,20-23 참조) 개념은 구원에 앞서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 심판의 한계를 결정짓는다. 즉 이 용어는 어떤 재앙이 임박했다는 위협과 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충실하리라는 확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네 백성이 설사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만 돌아올 것이다. 파멸은 이미 결정된 것, 정의가 넘쳐흐를 것이다. 정녕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미 결정된 멸망을 온 세상 한가운데에서 집행하실 것이다.”(이사 10,22-23)

 

 

 

바빌론 유배 말엽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제2이사야서(이사 40-55)의 저자는 하느님의 계획과 시간 개념을 시작과 끝이 있는 것으로(이사 41,22-23; 43,13) 바라본 최초의 인물로, 보편구원의 종말론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계획에는 모든 나라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주님의 종의 임무는 하느님의 약속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며,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와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이사 41,17-20).

 

이스라엘의 재건을 배경으로 하는 제3이사야서(이사 56-66)는 예루살렘 재건이 새로운 창조행위로, 이제 그곳은 만방의 민족들을 위한 구원의 도시가 될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이사 61,4-5). 또한 그는 창조하는 구원자인 하느님에 대한 고백을 통해 새로운 종말론적 전망을 전개한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사 66,17-18)

 

 

마침내 도래할 하느님 나라

 

신약성경의 종말 개념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고 집중된다. 그의 가르침 속에는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모두 들어 있으며, 둘 사이의 긴장은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비유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역동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겨자씨의 비유(마태 13,31-31)와 누룩의 비유(마태 13,33)를 보면, 하느님 나라는 갑작스레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성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하느님 나라는 마지막 때에 인간의 참여를 봉쇄하면서 갑작스럽게 급습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참여하에 서서히 점차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가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인 것으로 언급될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역사적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분의 선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긴박하다.’는 것을 강조한 점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까하는 의식주를 걱정하는 일보다도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25-33)고 했을 만큼 하느님 나라는 급하고도 중요하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도래하는 시간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시간은 오직 아버지에게만 유보된 것이다(마르 13,32). 따라서 사람들이 종말을 맞는 근본적인 자세는 그 시기를 알려고 하지 말고 오직 깨어 기다리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마태 25,1-3 ‘열 처녀의 비유참조).

 

다른 한편, 예수님이 말하는 종말은 기쁨의 종말이고 어디까지나 희망에 찬종말이다.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도래를 예수님은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쁜 사실로 소개하고 있다(마태 22,2-14). 이런 희망적인 가르침은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약성경의 초점이 되는 것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까지 연결된다. 만일 종말이 하느님과 인류 역사의 만남이라면, 여기서의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분이시다.

 

 

심판은 사실상 지금 여기서(Now/Here)

 

요한 복음사가의 종말론적 사고심판이라는 주제를 현실화하며, 예수님에 대해 지금 각자가 취하는 입장대로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요한 6,47.51). 참빛이신 그리스도는 요한 복음서에서 참된 종말론적 실재로,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거나 아니면 예수를 거슬러 결정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것이다. 심판은 요한에게 있어서 여전히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미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 때문에 현재 속으로 들어와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심판은 사실상 지금 여기서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판결의 집행이 될 것이다.

 

 

과거의 종말론이 불러온 오해

 

전통적 종말론은 개인 삶의 끝과 세상의 역사 끝에 올 미래 사건들을 위주로 전개되었다. 개인의 종말론에서는 죽음, 사심판, 천당, 연옥, 지옥의 실재가 규명되었고, 세상의 종말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육신 부활, 공심판, 세계의 종말이 규명되었다. 이런 전통적인 종말론에서는 미래사들을 명확히 말하지만, 오해의 여지가 상당히 있다. 즉 자칫하면 이 세계는 장차 올 종말 때까지만 존속하는 잠정적 공간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 종말론에서는 종말적 실재를 장소로 파악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곧 천당과 지옥의 표상이 장소 개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최종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인의 자세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교의 종말신앙은 더 이상 사말론’(죽음, 사심판과 공심판, 천당 ? 연옥 ? 지옥 ? 세상의 끝)에서 다루어졌던 주제에 의존하지 않고 삶에 대한 근본 태도와 완성에 도달하려는 그리스도인의 고군분투를 포함한다. 최종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먼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 혹은 종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목표로 이미 역사 안에서 역사에 방향을 부여하고 역사를 규정하는가 하면 그릇된 역사의 정황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지금이라도 우리의 구체적인 처지를 위해서 극히 중요하다. 따라서 교회가 아무리 자신의 본질과 사명을 자세히 성찰할지라도 현재의 상태만 본다면 일면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현재에서 순례하는 면과 천상에서 완성될 면을 아울러 고려해야 자기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구체적인 실재를 따져 본다면, 하느님 나라는 순전히 미래의 것으로 희망해야 할 실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오로지 기다려야 할 미래의 실재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선언하셨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이렇듯 하느님 나라는 두 가지 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미(already) 현존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직(Not yet)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은 선포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현재 안에 깊이 관련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희망(Hope)으로 구원된 우리

 

종말 사건에 관한 성경의 진술들은 미래에 발생할 사건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비유들이다. 예수님이 가르친 종말의 근본 내용은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2-14)에서 볼 수 있듯이 기쁨이며 희망이다. 성경의 진술은 종말의 시간과 실제 상황을 미리 알리는 점쟁이식 예언이 아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창조에 관한 말씀의 성격과 비슷하다. 창조에 관한 말씀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자연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계시, 곧 하느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바로 그분이 창조주라는 것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말씀도 종말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이끌고 돌보시는 하느님이 모든 창조물의 미래이며 최종 목표이자 구원의 희망이라는 근본적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종말의 희망은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인격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은 당연한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에 맞설 수 있는 든든한 희망을 얻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 목표를 확신할 수 있다면, 또한 이 목표가 힘든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면, 비록 고달프더라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는 현재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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