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의 도시들 - 시라쿠사, 레기움, 푸테올리 | |||
---|---|---|---|---|
이전글 |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마음의 할례와 율법서(신명기) | |||
다음글 | [성경용어] '은사'(charism)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등에 대하여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10-06 | 조회수1,684 | 추천수0 | |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의 도시들 (4) 시라쿠사, 레기움, 푸테올리
- 항구도시 시라쿠사(BiblePlace.com)
몰타에서 3개월을 지내며 겨울을 난 바오로 일행은 다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배는 몰타섬 북쪽 시칠리아섬의 남동쪽에 있는 항구 도시 시라쿠사에 상륙해 그곳에서 사흘을 지냅니다(사도 28,11-12). 시칠리아섬은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섬으로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기도 합니다.
시칠리아에서 사흘을 머무르고
몰타에서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까지 거리는 150㎞ 정도 됩니다. 당시 배 속도로 보면 이틀가량 걸렸을 것입니다. 바오로 일행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시라쿠사에 도착해 사흘이나 머문 것은 시라쿠사가 중요한 무역항 기능을 하고 있어서 짐을 부리거나 싣기 위해서였으리라고 봅니다. 바오로가 탄 배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한 무역선임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추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가 있는 북쪽으로 항해하는 데에 필요한 남풍을 기다리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시라쿠사는 당시 무역항이었을 뿐 아니라 학문과 지식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 버금가는 도시였던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로 유명한 기원전 3세기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이었습니다. 그와 거의 동시대 시인인 테오크리토스도 시라쿠사 출신이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는 시라쿠사를 두고 “모든 그리스인 도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호평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도시 시라쿠사에서 사흘이나 머물렀다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수인의 몸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자유로웠던 바오로는 시간을 내어 도시를 구경했을 수도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 (위) 레기움 시가지(BiblePlace.com), (아래) 베수비오 산에서 내려다본 나폴리만, 아래쪽이 나폴리이고 위쪽이 푸테올리(BiblePlace.com)
이탈리아 최남단의 항구도시 레기움
사흘 후 시라쿠사를 떠난 배는 다시 섬 동쪽 연안을 타고 북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레기움에 닿았고, 그곳에서 하루를 쉬었다가 남풍이 불자 다시 출발해 이틀 만에 푸테올리에 도착합니다(사도 28,13).
오늘날 레조 디 칼라브리아(Reggio di Calabria) 또는 그냥 레조라고 부르는 레기움은 이탈리아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에서 장화 코끝에 자리하고 있으며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시칠리아섬 북동쪽 끝의 항구 도시 메시나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메시나 해협은 바람의 변화가 심해서 배들이 항해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들은 레기움에 도착하면 비교적 안전한 항구인 그곳에서 순풍이 불 때를 기다렸다가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바오로 일행이 탄 배도 레기움에 도착해서 대기하다가 하루 후 순풍인 남풍이 불자 닻을 올리고 출항한 것입니다.
레기움은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인들의 식민지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는 크게 번성했는데 이후 부침을 거듭하면서 도시 이름도 페비아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후 1세기 초에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정착하면서 도시를 재건하고 율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 ‘레기움 율리움’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일행이 레기움에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전승에 따르면 바오로가 레기움을 거쳐 간 것을 계기로 이 일대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신자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을 만나 일주일을 머무른 푸테올리
바오로 일행이 탄 배가 다시 닻을 올려 항해를 계속해 이틀 만에 도착한 푸테올리는 이탈리아 중남부 나폴리만 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오늘날 나폴리에서 서북쪽으로 8㎞가량 떨어진 ‘포추올리’라는 작은 도시가 바로 고대 푸테올리입니다. 기원전 6세기쯤에 도시로 건설된 푸테올리는 바오로가 이곳에 도착했을 당시인 기원후 1세기 중엽에 가장 번성해 주민이 1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로마에서 270㎞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푸테올리는 1세기 말 로마 서쪽 티레니아해 연안에 오스티아 항구가 완공되기 전까지 로마의 외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집트와 팔레스티나의 많은 물자가 배편으로 푸테올리까지 와서 육로를 통해 로마로 옮겨졌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일행이 “푸테올리에 이르러 형제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청을 받고 이레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고 전합니다(사도 28,14). 이 형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푸테올리에 언제 신자들이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역사가들은 1세기 당시에 푸테올리에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어쩌면 유다인들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사도 18,2 참조) 로마를 떠나 동포들이 사는 푸테올리로 이주한 유다인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프리실라와 아퀼라 부부처럼 신자가 된 유다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일행이 요청을 받고 일주일이나 머물렀다면 일행에게 청을 한 “형제”들은 바로 이런 유다계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에게 상소해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수인의 몸인 바오로가 푸테올리에서 일주일이나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신분으로서 비교적 자유로운 처신이 허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사이에 바오로에 관한 소문이 로마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형제들은 바오로를 맞으러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사도 28,15).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펴봅니다.
- 그리스 신전 기둥을 이용한 시라쿠사대성당 내부(좌), 시라쿠사의 고대 원형경기장(BiblePlace.com)
바오로가 사흘 동안 지낸 시라쿠사는 성녀 루치아(283~304)의 고향이자 순교지이기도 합니다. 시라쿠사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루치아 성녀가 순교한 자리에는 비잔틴 시대에 처음 지어진 산타루치아 엑스트라 모에니아 성당이 있습니다. 시라쿠사는 또 7세기에 세워진 시라쿠사 대성당으로도 유명합니다. 고대 그리스 신전에 사용됐던 기둥들이 그대로 대성당 기둥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기념하는 바오로 성당도 있지만 한참 늦은 18세기에 지어진 성당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루를 머물렀던 고대 도시 레기움은 1908년 대지진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오늘날 레조 디 칼라브리아는 그 이후에 세워진 신도시입니다. 하지만 인구 5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해 고대 레기움의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바오로가 일주일을 지낸 푸테올리 곧 오늘날의 포추올리는 1세기 중반 오스티아 항구가 건립되어 번창하면서 항구 도시로서의 중요성을 점점 상실해 갔습니다. 하지만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을 비롯한 로마 시대의 포룸(광장) 같은 유적들은 이곳이 고대에 번성했던 항구 도시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0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