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헤로데 대왕과 헤로데 안티파스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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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7-02-03 | 조회수2,739 | 추천수0 | 신고 |
[성경의 세계]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데 대왕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어머니 말다케(Malthake)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대왕의 첩이었다. 말년의 헤로데는 왕후 미르얌이 낳은 왕자들을 처형한다(BC 7년). 죽기 며칠 전에는 첫 부인 도리스의 아들까지 죽였다(BC 4년). 그는 공인된 후계자 신분이었다. 이후 헤로데는 세 명의 아들에게 왕국을 나눠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세 아들 중의 하나가 안티파스다. 할당된 땅은 이스라엘 북부지역이었고 이렇게 해서 예수님 시대의 갈릴래아를 다스렸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살해했으며(마르 6,17-29) 예수님의 수난에도 관여했다. 총독 빌라도가 체포된 예수님을 그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 없이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낸다(루카 23.6-11).
안티파스는 어린 시절을 로마에서 보냈다. 헤로데 대왕은 황제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아들인 그를 인질로 보냈다. 덕분에 앞선 교육을 받았고 사고방식도 유다인들과는 달랐다. 갈릴래아 영주(마태 14,1)가 되자 즉시 도시를 정비했고 로마식으로 리모델링했다. 대표적인 것이 갈릴래아 호숫가에 세운 휴양도시 티베리아스다. 도시 이름은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서 따왔다.
안티파스의 첫 부인은 인접국가 나바테아의 공주였다. 요르단 남부에서 사해 동부 쪽으로 포진해 있던 유목민이 나바테아족이다. 권력이 강화되자 안티파스는 이방인이었던 아내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아 왕족 출신의 헤로디아와 재혼한다. 왕위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헤로디아 역시 왕비가 될 기회였기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둘의 결합은 율법의 위반이었다. 제수(弟嫂)와의 혼인이었기 때문이다.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반감을 드러냈고 세례자 요한은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와 미르얌 왕후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다. 그러니까 안티파스에게는 이복형의 딸로 조카인 셈이다. 그런데 헤로디아는 헤로데의 셋째 부인 아들과 혼인했다가 이혼한 상태였다. 그는 필립 1세로 훗날 반란에 연루되어 암살당한다. 분봉왕 필립 2세(루카 3,1)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무튼, 헤로디아는 안티파스에게 제수이면서 조카였던 여인이다.
기원후 37년 로마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헤로디아의 오빠였던 아그리파 1세와 절친했다. 이스라엘 왕위가 오빠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한 헤로디아는 안티파스를 충동질해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게 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 사건으로 칼리굴라의 분노를 사게 된다. 39년 안티파스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프랑스 지방으로 추방된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죽었다.
[2014년 5월 18일 부활 제5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미국 덴버 한인성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헤로데 대왕 (1) 헤로데는 로마제국이 임명한 유다의 첫 번째 왕이다. 통칭 그에게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후계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그는 기원전 73년에 태어나 기원후 4년에 죽었다. 그의 치세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후 4년을 넘지 못한다. 헤로데는 시나이 반도와 사해 중간에 위치한 에돔(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는 에돔을 희랍어로 음역한 것이다. 그의 부친 ‘안티파트로스’는 부유한 아랍인으로 에돔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해 동쪽에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귀족이었다. 헤로데는 일생을 유다인으로 처신했지만 부계와 모계는 이렇듯 아랍혈통인 셈이다. 이 사실은 두고두고 그의 정치적 핸디캡이 된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안티파트로스는 로마를 지지했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 세력다툼이 생기자 카이사르 편에 가담했다. 그의 ‘줄타기’는 성공했고 카이사르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로마시민권을 주며 유다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의 신분은 아들들에게도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헤로데는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다. BC 47년 안티파트로스는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통치권을 맡긴다. 정치 시험무대였다. 헤로데는 기대 이상의 수완을 발휘했고 로마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맺으며 인지도를 넓혀갔다. 그러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BC 44년).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은 내분에 휩싸인다. 안티파테르는 음모에 걸려 희생되었고 헤로데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로 숨어들어가 재기에 성공한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다 왕’으로 명명하며 군대를 주었던 것이다(BC 37년). 이스라엘의 내분을 수습하라는 주문이었다. 이것이 ‘헤로데 대왕’의 출발이다. 이렇게 되자 36세의 헤로데는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유다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32년 동안 모든 수완을 동원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냈다. 왕이 된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대립했을 때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BC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와 함께 제거되고 만다. 이후 실권은 옥타비아누스가 잡았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다(루카 2,1). 헤로데는 즉시 잘못을 고백하며 처분을 기다린다. 그러나 냉정한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받아준다.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티나를 끌고 갈 인물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헤로데는 다시 한 번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2010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성경 속의 인물] 헤로데 대왕 (2) 로마는 헤로데를 왕으로 임명했지만 유다인들은 ‘하스모니아’ 왕가에서 임금이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스모니아 왕가는 ‘마카베오 형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오랜 투쟁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유다의 독립을 실현한 자들이다. 이후 백성들은 그들을 ‘대제사장과 사령관’으로 받아들였고 세습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하스모니아’ 왕조의 출발이다. 민심을 알고 있던 헤로데는 아내 ‘도리스’(Doris)와 이혼하고 하스모니아 출신의 ‘미르얌’(Miriam)과 재혼한다. 그녀는 대제사장을 지낸 ‘히르카누스 2세’의 손녀였으며 ‘시몬 마카베오’의 직계였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여전히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헤로데를 에돔 출신의 벼락 출세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의 견제를 위해 가나안에 속한 이집트 땅을 유다에 일임한다. 헤로데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명실상부하게 팔레스티나의 강자로 떠올랐다. 이후 헤로데는 수많은 요새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해 인근에 세운 ‘마사다’ 요새와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카이사리아 항구’다. 특히 카이사리아(Caesarea)는 페니키아의 옛 도시였는데 12년을 걸려 리모델링했다. 도시 이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후견인이었던 ‘카이사르’에서 따온 것이었다. 헤로데는 콘크리트를 이용한 최초의 수중공법을 사용했다. 카이사리아의 방파제는 500미터가 넘었고 사용된 바위 가운데는 20톤이 넘는 것도 있었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물위에 틀을 띄워놓고 그 안에 콘크리트를 채워 가라앉히는 방법을 사용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남긴 기록이다. 동시대의 우리나라는 해모수의 아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통치를 시작하던 때였다. 이후 자신감이 넘친 헤로데는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을 구상한다. 하지만 헤로데는 나이 들수록 어둡고 잔인해졌다. 측근들을 의심해 제거했고 아내 미르얌과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마저 살해했다. 나중에는 왕위를 물려주려던 맏아들도 로마의 승낙을 얻어 사형에 처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베들레헴 어린이들의 살해 역시 그의 이러한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유언을 통해 유다왕국을 세 명의 아들에게 분배한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아르켈라오스’에게 주었고(마태 2,22) 왕의 칭호 역시 그가 받았다. 헤로데는 동맥경화에 시달리다 70세에 죽었다(기원후 4년). 로마는 유다의 지배를 위해서는 ‘헤로데 왕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후계자를 인정했다. 하지만 아르켈라오스는 2년 뒤에 퇴위 당하고 유다는 로마의 직할령이 된다. 총독이 다스리는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헤로데의 말뜻은 ‘영웅의 아들’이란 의미다. [2010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호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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