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쓸모없는 종(루카 17,10) / 안소근 실비아 수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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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복선 | 작성일2017-02-27 | 조회수2,706 | 추천수0 | 신고 |
<성경 자료실에서 옮겨 왔습니다.>
[말씀 그루터기] 쓸모없는 종(루카 17,10)
새 학년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다가오는 한 해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해마다 연초에 새로운 다짐들을 해왔지만, 올해에는 유난히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아마 1년 후에 보면, 실제로 일한 양은 다른 해보다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올해에는 끝맺어야 할 일 하나와 이제 시작하려는 일 하나가 제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 보니 시작부터 뭔가 부담스런 느낌입니다. 그러니 금년의 다짐도, 어떤 마음으로 그 일들을 해야 할까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들이 저를 위한 일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작년부터 그런 지향으로, 일할 때에 책상에 촛불을 켭니다. 좀 번거롭기는 하지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도움은 됩니다.
하여튼 그래서, 올해에 할 일들을 위한 성서 구절 하나를 고르려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할 일을 다한 후에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하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쓸모없다? 별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할 단어는 아닙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돌아와서도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주인의 시중을 들라니, 어찌 보면 종들에게 너무 야박한 것 같고, 옛날 사람들은 종들을 저렇게 대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했다면 어쨌든 쓸모가 있는 것 아닌가요?
의심스런 마음으로 다시 “쓸모없다”는 단어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뜻 같습니다. 이득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쓸모없다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는 방금 인용한 루카 복음 17장에서와 마태오 복음 25,30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탈렌트의 비유 마지막 부분에서,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종에 대하여 주인이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버려라.”라고 말합니다. 다섯 탈렌트를 맡겼는데 다섯 탈렌트를 더 번 종은 이익을 가져오는 종이고, 한 탈렌트를 맡겼는데 한 탈렌트만 그대로 가지고 온 종은 본전 그대로입니다. 결국 신약 성경에서 “쓸모없다”는 단어는 두 번 모두 종에게 적용되어, 주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는데도(루카 17,20)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직장에서 지각 안하고 정시에 출근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지 그 직장에 특별한 이득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아마 이런 경우도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그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지만, 그가 한 일은 당연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할 일을 다한 다음에는 그것이 무슨 공로가 되는 양 내세우지 말고 그저 그것이 “해야 할 일”이었다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성경 여러 곳에 나오는 불행 선언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저주입니다. 루카 복음 6장에 나오는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등등의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자기 자신을 향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바오로 사도 자신이 마치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그만큼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자유의사로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직무로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삯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1코린 9,17 참조).
복음을 전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종이 주인의 음식을 준비하고 시중을 드는 것이 당연하듯이 바오로 사도에게 그 일은 자랑할 일도 아니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바오로 사도를 위대한 성인이라고 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바오로 사도는, “저 사람들은 사도가 뭔지 모르는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정말 많은 일들을 했지만, 자신이 위대해서 그 일들을 했다고는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이것은 바오로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면, 내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일들을 한다면 그것은 업적이 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내가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내가 선택했으니 나를 알아달라고, 나에게 고마워해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수 있을까요?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하지는 않는다 했습니다(루카 17,9). 저에게 한 몫의 할 일을 주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시어, 한 몸의 지체들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하십니다(1코린 12 참조). 하느님께서 나를 발로 만드셨다면 걸어 다니는 것이 당연하고, 눈으로 만드셨다면 앞을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걸어 다닐 수 있게 해주신 것은 발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은 눈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앞으로 한 해 동안 제가 할 일들을 생각해봅니다.
매주 있을 수업들, 쓰던 책과 번역하기 시작한 책, 매달 쓸 원고들, 만들고 있는 자료들…… 그렇지요, 이 모두가 사실 하느님을 드러내야 하는 일들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도록 하기 위한 일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제 일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들입니다. 그것이 왜 “해야 할 일”이고 “하지 않으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인지 한참 생각하다 보니, 성경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결국 다시 창세기 1장으로 갔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그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우리와 비슷하게”라는 번역은 아무래도 약한데, 인간이 하느님의 상(像)이 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의 상은 세종대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이순신 장군의 상은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듯이, 하느님의 상인 인간은 하느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상을 만들기를 금지한 구약 성경은 인간에게 네가 바로 하느님의 상이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됩니다.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이 있습니다. 말로 하면 너무 엄청나고 또 실제 삶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이렇게 공공연히 밝히기가 꽤나 민망하기는 한데, 어쨌든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꿈이 너무 크지요? 사실 저도 복음서에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는 말씀을 보면 너무 부담스러워서 성경을 덮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덮어버린다 해도 엄연히 적혀 있는 말씀을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이제 창세기의 말씀을 기억할 때,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는 것은 대단한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고, 그렇게 했다고 해서 자랑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선한 삶을 살라는 복음의 말씀은 지향해야 할,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머물지 않고 실천해야 할 삶으로 요구됩니다. 종이 주인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다가오는 한 해가, 행하는 모든 일과 삶 전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도, “쓸모없는 종”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엄청난 일을 했다 해도 그것은 “해야 할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땅끝까지 제80호, 2014년 3+4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성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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