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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를 거쳐 로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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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11-11 조회수1,414 추천수0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를 거쳐 로마로

 

 

- 베드로 대성전에서 내려다 본 로마(BiblePlace.com)

 

 

푸테올리에서 이레를 지낸 바오로 일행은 그곳을 떠나 마침내 로마에 도착합니다(사도 28,14). 당시에는 푸테올리가 로마의 외항 역할을 했기에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아프리카에서 뱃길로 푸테올리까지 온 물자들은 여기서부터는 육로를 통해 로마로 운송됐습니다. 푸테올리에서 로마까지는 210㎞ 남짓으로, 걸어서 가더라도 일주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바오로를 마중 나온 로마의 형제들

 

푸테올리에서 북쪽으로 하룻길을 걸으면 로마 제국의 첫 번째 고속도로라고 불리는 비아 아피아(Via Appia)를 만납니다. 기원전 312년쯤에 이 도로를 처음 건설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이름을 딴 도로입니다. 흔히 ‘아피아 가도’라고도 하는 비아 아피아는 로마에서 평야 지대를 따라 남으로 내려오다가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푸테올리 북쪽의 카푸아까지 이어지고 계속해서 이탈리아반도 남동쪽 끝 항구도시 브린디시까지 연결됩니다. 바오로 일행은 이 비아 아피아를 따라 로마로 향했을 것입니다.

 

바오로가 온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로마의 형제들은 아피우스 광장(Appi Forum)과 트레스 타베르내(Tres Tabernae)까지 일행을 맞으러 내려옵니다. 로마에서 비아 아피아를 따라 남쪽으로 65㎞가량 떨어진 아피우스 광장은 오늘날 파이티(Faiti)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 곳입니다. 당시 비아 아피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를 통해 사람들은 그곳이 로마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마흔세 번째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던 아피우스 광장에는 일종의 간이 휴게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트레스 타베르내는 아피우스 광장에서 로마 쪽으로 10㎞쯤 더 올라간 곳인데, 세 개의 주막 혹은 여관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 로마로 이어지는 비아 아피아(좌) 트라스 타베르내 지역(BiblePlace.com)

 

 

로마의 형제들이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까지 바오로를 맞으러 왔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말이나 마차 등 다른 탈 것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일부는 적어도 하룻길을(트레스 타베르내), 또 다른 이들은 이틀 길(아피우스 광장)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바오로에 대한 애정 또는 존경심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을 본 바오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용기를 냅니다.

 

아피우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내까지 바오로를 마중 나온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일까요? 바오로는 57년 또는 58년쯤에 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끝부분에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인사하는데 거기에 거론된 이들이 바오로를 맞으러 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로마 16,3-15 참조). 예를 들면 코린토에서 바오로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한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번째 사람인 에패네토스, 바오로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 같은 이들입니다.

 

- 로마 레골라 지역에 있는 성 바오로 기념성당(BiblePlace.com)

 

 

죄수의 신분이지만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하다

 

자신을 마중 온 이들과 함께 로마에 도착한 바오로는 수인의 몸이었기에 일행과 떨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사도 28,16). 아마 바오로는 자신의 돈으로 셋집을 얻어 그곳에서 병사 한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지냈을 것입니다(사도 28,30 참조).

 

이것은 바오로가 비록 수인의 몸이기는 하지만 가택 연금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바오로는 로마에 도착한 지 사흘 후에 로마의 유다인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죄수가 되어 로마에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유다인 지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따로 날짜를 정해 그들과 만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명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증언하고 예수님에 관해 설득합니다(사도 28,17-23). 웬만큼 자유롭지 않으면 죄수의 몸으로 이런 활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황제에게 상소를 청함으로써 죄수의 몸이 되어 카이사리아를 떠날 때부터 로마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백인대장의 감시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페스투스 총독이 바오로를 그만큼 비중 있는 인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로마에 도착한 후 바오로에 대한 감시나 보호는 허술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바오로를 책임지는 군인은 장교인 백인대장이 아니라 겨우 군사 1명이었고 바오로는 감옥이 아니라 자신이 마련한 셋집에서 만 2년을 지냅니다. 나아가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담대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칩니다. 이렇게 대비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선 바오로가 유다인이기는 하지만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다종교를 용인한 로마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점령지들의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티나에서 유다인들의 종교 문제로 황제에게 상소한 사건은 제국에서 볼 때는 하찮은 문제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바오로가 죄수의 몸이지만 자유로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 아피우스 광장의 비아 아피아 포장석(좌) 발굴 안내판이 있는 트라스 타베르내 지역(BiblePlace.com)

 

 

바오로가 마중 나온 로마의 형제들을 만난 아피우스 광장 터에는 옛 로마 시대의 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비아 아피아를 따라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월의 흐름이라는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있지요. 옛 비아 아피아를 따라 포장도로가 나 있고 길가에는 작은 호텔도 있습니다. 호텔 근처에 있는 다리를 살펴보면 포장도로 아래에 옛 로마 시대 도로인 비아 아피아의 흔적이 보입니다. 세 주막이 있던 트레스 타베르내 일대는 농경지와 평야로 바뀌었으나 길가에는 트레스 타베르내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한편 바오로가 로마에서 이 년 동안 지냈다는 셋집은 어딘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로마 팔라티노 언덕에서 1㎞ 남짓 떨어진 티베르 강 인근 레골라(Regola) 지역이 바오로가 연금 상태로 지낸 셋집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고 바오로 기념 성당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당은 1700년쯤에 건립된 성당이어서 역사적으로 바오로가 머무른 지역이라는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면 이 장소들은 로마로 호송되는 바오로가 자신을 마중 나온 형제들과 얼싸안으며 용기를 얻고 연금 상태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그 감격적이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1월호,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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