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엘리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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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12-03 | 조회수2,604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엘리사 (1)
엘리사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던 엘리사가 그 이름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놀라운 방식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된 계기는 엘리야와의 만남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부유한 가문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1열왕 19,19-21). 그가 소유한 열두 마리의 겨릿소는 엄청난 부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열두 번째 겨릿소를 끌었다는 사실은 다른 소들을 끄는 열한 명의 사람들을 부리는 지위에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던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나섭니다. 그리하여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기원전 852년경부터 798년경까지 예언자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계승할 때 그의 영의 두 몫을 청합니다(2열왕 2,9). 이 두 몫을 갑절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속자도 아버지의 전 재산의 두 배를 원할 수 없듯이, 어떤 제자도 스승의 두 배의 능력을 원할 수 없습니다.
신명 21,17에 따르면 장자는 두 몫의 상속권을 가집니다. 아들이 둘이면 아버지 재산을 셋으로 나누어 두 몫인 2/3, 아홉이면 열로 나누어 두 몫인 2/10를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얼마로 나눈 것의 두 몫을 원한 것일까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얼마나 이어받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엘리사를 엘리야의 정당한 계승자로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처럼 카르멜산에서의 바알 예언자들과의 대결이나 승천과 같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지만, 스승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죽은 아이를 살린 기적(2열왕 4,8-31)과 음식을 많게 한 기적(2열왕 4,42-44)을 행한 것뿐 아니라 물을 정화한 기적(2열왕 2,19-25), 국 안에 든 독을 밀가루로 해독한 기적(2열왕 4,38-41),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한 기적(2열왕 6,1-7), 나아만의 치유 기적(2열왕 5장) 등을 일으켰습니다. 엘리사는 참으로 기적의 사람이라 부를 만합니다. 유다 전승 미드라시는 심지어 엘리사가 산에서 산으로 순간 이동까지 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4일(가해)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엘리사 (2)
엘리사가 일으킨 많은 기적 가운데 오랫동안 윤리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 하나 있습니다.
2열왕 2,23에 따르면 엘리사는 대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연적인 탈모로 인한 대머리로 보기도 하고, 예언자의 표지로서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깎은 것으로 해석하거나, 이스라엘의 장례 관습에 따라 엘리야의 승천(더는 이 땅에서 엘리야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승천을 죽음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을 애도하기 위해 머리를 민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엘리사의 대머리 때문에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리사가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자 곰이 아이들을 찢어 죽인 것입니다. 아이들의 장난에 대한 대가로서는 너무 과하고 잔인하게 보이죠. 엘리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완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예언자들을 반대하던 이들이 만들어 낸 풍자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 일은 엘리사 예언자가 오염된 예리코의 물을 정화하는 기적(2열왕 2,19-22)을 행한 직후에 일어납니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의 인사가 아니라 조롱을 한 것이죠. 그것도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말입니다.
게다가, 사실 요즘도 ‘얼평’(얼굴 평가)을 하는 것은 금기시되지만, 이스라엘에서는 특히 외모에 대한 조롱은 하느님께 대한 조롱으로 여겨졌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분노한 가장 큰 원인은 ‘올라가라!’(2열왕 2,23)라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않고 비아냥거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곧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물려받은 권위를 무시한 것이며, 나아가 엘리야와 엘리사를 예언자로 선택하신 하느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이야기는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거룩함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이나 그분께 속한 거룩한 것을 함부로 대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잘 보여주었습니다(레위 10,1-2).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예언자를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예언자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2열왕 4,9)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11일(가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엘리사 (3)
1열왕 18장도 경이로운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근이 끝나자 엘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과 페니키아의 경계, 즉 야훼 하느님과 바알 사이의 중립 지역에 있는 해발 400m 높이의 카르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 850명과 대결을 벌입니다.
각자 하느님과 바알에게 기도해서 제물에 불을 붙이는 내기를 통해 누가 참된 신인지를 가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정한 대결처럼 보이지만, 페니키아인들은 비가 자주 내리는 카르멜산(수량이 풍부해서 지중해 해안의 도시 카이사리아까지 도수교를 연결해 물을 끌어다 썼을 정도입니다)이 천둥과 번개의 신인 바알의 성소라 믿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바알은 자기 예언자들의 기도에 침묵하기만 합니다. 심지어 절뚝거리며 제단을 돌고(이것은 광란의 춤을 뜻합니다) 창과 칼로 제 몸까지 찔러대며 난리를 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실패한 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는 이상한 일을 합니다. 불을 붙여야 할 장작과 제물에 철철 넘치도록 물을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느님께는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권능을 드러내는 탁월한 방법이 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을 태운 불이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제단을 쌓았던 돌까지 녹여버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불임에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이 엄청난 기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불행히도, 그러기에는 이제벨 왕비의 우상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그런 이제벨을 향한 아합왕의 집착이 너무나 강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엘리야 예언자가 살해 위협을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피하고 피하다가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의 남쪽 끝 시나이산의 다른 이름인 호렙산으로 도피합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하느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열왕 19,4) [2022년 12월 18일(가해) 대림 제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엘리사 (4)
엘리사가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낸 기적 하나를 보겠습니다(2열왕 5장). 아람 왕 벤 하닷은 총애하는 장군 나아만이 불치의 피부병에 걸리자 북 이스라엘의 임금 요람에게 보내 고쳐주게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예언자는 왕에게 봉사하며 명을 받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닷은 요람에게 요청하면 당연히 그의 예언자가 나아만을 고쳐 주리라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왕이 아니라 하느님께 봉사하고 그분의 명만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요람은 하닷이 그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2열왕 5,7)
전운이 감도는 이때 이스라엘을 위해 엘리사가 나섭니다. 그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지시합니다. 엘리사가 직접 치유를 위한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역할을 최소화함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더욱 크게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몸은 7번 씻어야 하는데, 레위 14,7-9에 따르면 7이라는 숫자는 악성 피부병의 정결 예식과 관련된 수입니다. 피부 병자에게 피를 일곱 번 뿌리고 7일 동안 기다리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하느님의 사람의 지시, 즉 하느님의 지시를 따르자 치유됩니다. 그래서 불치병에서 해방된 나아만은 하느님께 대한 유일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람에 돌아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이스라엘의 흙을 얻어갑니다.
고대인들은 각각의 신에게는 고유한 영역이 있어, 거기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신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더라도, 거기서 가져온 흙 위에 제단을 쌓으면 그의 영향력은 연장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하느님의 제단을 쌓을 거룩한 땅을 다지는 데 사용하기 위해 흙을 실어 간 것입니다.
하느님 신앙의 초심자인 나아만은 아직 이방종교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수량이 풍부하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아람의 수도 다마스쿠스의 강에서 고치지 못한 병을 작고 볼품없는 요르단강에서 치유한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살아계신 유일한 신이라는 진리의 산증인이 되었습니다. [2023년 1월 1일(가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엘리사 (5)
흥미롭게도 우리 전래동화인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와 비슷한 기적도 있습니다(2열왕 6,1-7). 예언자 학교 신축 공사 중 제자 하나가 빌려온 도끼를 요르단강물에 빠뜨리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자 도끼를 잃어버린 제자는 절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에 쇠로 만든 도구들은 매우 큰 가치가 있었고, 빌린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값어치만큼 종살이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자 쇠로 만든 도끼가 마치 나뭇가지처럼 떠오릅니다.
이 기적은 국가적 차원의 심각한 이야기 사이에 생뚱맞게 끼어있는 순전히 개인적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과 관계될 수 있습니다. 고대의 가장 유용한 도구인 도끼는 하느님의 도구인 이스라엘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도끼가 이스라엘의 상징이라면, 그것이 물에 잠긴 일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손에 넘어갈 것을, 다시 건져 올려진 일은 하느님께서 이방 민족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엘리사는 예언자로서 완벽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잘못은 있습니다. 이 잘못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되살린 기적 이야기에 들어있습니다. 성경의 탄생 기적은 모두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데, 엘리사는 마치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는 듯이 말합니다: “내가 부인에게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소? ...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2열왕 4,13. 16) 이것은 수많은 위대한 기적을 행한 모세가 교만에 빠진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민수 20,10)
그런데 기적적으로 탄생한 수넴 여인의 아들이 그만 죽고 맙니다. 이것을 하느님께서 엘리사의 교만으로 이루어진 기적을 되돌리신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일이 일어나자 엘리사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립니다: “부인에게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다만 주님께서 그 일을 나에게 감추시고 알리지 않으셨구나.”(2열왕 4,27)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엘리사는 변합니다.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점지해 줄 때는 하느님의 뜻을 묻지 않았지만, 죽은 아들을 소생시키는 의식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로 시작합니다(2열왕 4,33). [2023년 1월 8일(가해)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엘리사 (6)
스승 엘리야 사후에도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어갔습니다. 우상숭배가 온 이스라엘에서 요란스럽게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윤리적 타락 또한 극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여전히 악했으며, 특히 모든 악의 근원과도 같은 이제벨 왕비도 아직 멀쩡히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당연히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에게도 고발하고 맞서 싸우는 예언자의 모습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윤리적 타락에 대해 침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그의 이야기에는 그러한 현실이 아예 언급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엘리사는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습니다. 실제로 엘리사 이야기에는 사건들의 역사적 재구성을 도와줄 어떤 연대기적 표지도 들어있지 않으며, 지리적 기록 또한 모호합니다.
엘리사 활동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방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확장해 오던 아람의 잦은 침입으로 곤욕을 치르던 때였습니다. 전쟁의 북소리가 들리면 오로지 전쟁 승리에 모든 국력을 모으기 위해 법은 침묵한다고 했는데, 엘리사도 아람 군대 앞에 선 이스라엘의 운명이 풍전등화였기에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가의 자존심을 실추시킬 수 있는 종교적, 윤리적 비판을 일단 접어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사는 놀라운 기적들을 연이어 일으키면서, 그 힘의 근원이 하느님임을 분명히 합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바알이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며 물을 통제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요르단강물을 갈랐고(2열왕 2,8-14), 예리코의 죽은 물을 되살렸으며(2열왕 2,19-22), 메마른 광야에 물을 제공했습니다(2열왕 3,4-27). 또한, 요르단강물로 나아만의 피부병을 치유했고(2열왕 5,1-19), 물이 스스로 도끼를 떠올리게 했습니다(2열왕 6,1-7). 하느님의 예언자인 엘리사는 이 기적들로써 물을 통제하는 신이 바알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 때 모세가 10개의 자연 기적을 일으킴으로써 이 세상의 주권이 이집트 신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있음을 증명한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엘리사는 비록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이스라엘을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참 하느님을 증거하며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2023년 1월 15일(가해) 연중 제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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