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승리의 하느님(여호수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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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3-01-04 | 조회수1,342 | 추천수0 | |
[하느님 뭐라꼬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승리의 하느님
여호수아와 함께하신 하느님
“오늘 내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여 주기 시작하겠다. 그러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준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여호 3,7)
“주님 군대의 장수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여호 5,15)
여호수아는 일찍이 모세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백성을 이끌어 갔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러하셨듯이 여호수아에게도 그와 함께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또 천사의 모습(주님 군대의 장수)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이 하느님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도 함께하시고 또한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불타는 떨기 속에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이라 소개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시며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태 22,32)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또 나의 하느님이신 분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또 지금의 나에게도 들려오는 말씀일 것이니 힘을 내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예리코 점령, 하느님의 업적
“보아라, 내가 예리코와 그 임금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너희 군사들은 모두 저 성읍 둘레를 하루에 한 번 돌아라. 그렇게 엿새 동안 하는데, 사제 일곱 명이 저마다 숫양 뿔 나팔을 하나씩 들고 궤 앞에 서라, 이렛날에는 사제들이 뿔 나팔을 부는 가운데 저 성읍을 일곱 번 돌아라. 숫양 뿔 소리가 길게 울려 그 나팔 소리를 듣게 되거든, 온 백성은 큰 함성을 질러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때에 백성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올라가거라.”(여호 6,2-5)
“사제들이 뿔 나팔을 부니 백성이 함성을 질렀다. 백성은 뿔 나팔 소리를 듣자마자 큰 함성을 질렀다. 그때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은 저마다 성읍을 향하여 곧장 앞으로 올라가서 그 성읍을 함락하였다.”(여호 6,20)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그러하셨듯이 여호수아와도 함께하셨기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 처음으로 수행한 예리코 사람들과의 전쟁은 하느님께서 손수 앞장서서 싸워주신 성전(聖戰)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예리코에서 거둔 승리는 군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에 따랐던 사제들과 백성들의 행동에 대한 하느님의 업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리코의 점령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움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을 공경하며 보인 사제들의 전례적인 행위와 백성들의 순명의 결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호의에 의해 베풀어졌던 선물이었지요.
내 삶의 지난 여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내가 이뤘다고 생각했던, 내가 잘해서 해내거나 달성했다고 여겼던 일들, 그 일들이 과연 내가 다 이루어 낸 것일까요? 어쩌면 나의 역할은 너무나 미미했고, 나와 함께 하셨던 하느님께서 그러한 일들 속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분의 섭리와 은총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또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일들이 생각보다 많음에 놀라워할 것입니다!
완전 봉헌물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을 위한 완전 봉헌물이다. … 너희는 완전 봉헌물에 손을 대지 않도록 단단히 조심하여라. 탐을 내어 완전 봉헌물을 차지해서 이스라엘 진영까지 완전 봉헌물로 만들어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없게 하여라.”(여호 6,17-18)
신명기 13장과 20장에서의 언급에 이어 이제 여호수아기에서도 완전 봉헌(完全奉獻)에 관한 율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완전 봉헌이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에 대해서 그 누구도 탐을 내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하여 하느님께 봉헌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승리이기에 하느님이 아닌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앞서 여호수아기를 들어가며 알아보았듯이, 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그곳에 사는 민족들에 대해 특별히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을 전멸시키지 않고 그들과 섞여 살아간다면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이 잘못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예 그럴 가능성을 애초부터 제거하려는 의도였지요.
하지만 이러한 완전 봉헌은 실제로 가나안 땅에서조차 철저하게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드물게 이 원칙을 지켰는데, 가나안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정복한 성읍의 가축이나 전리품을 자기 것으로 갖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 봉헌의 원칙은 여호수아기 11장에서 가나안 북부를 점령하여 가나안에 대한 점령을 끝낼 때도 나타납니다.
“저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일 이맘때, 내가 이스라엘 앞에 그들을 모두 시체로 넘겨주겠다. 너는 그들의 군마 뒷다리 힘줄을 끊고 병거들을 불에 태워라. … 그때 여호수아는 … 또한 그 성읍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여 완전 봉헌물로 바쳤다. 이렇게 그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 11,6-11)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은 그분께 대한 우리의 공경을 잘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저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정작 육신을 지니고 살면서 그 육신에 필요한 것들도 많고, 또 생각도 욕망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나 자신이 하느님께 온전한 봉헌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일찍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은 어떤 면에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루카 20,25)
그러면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일까요? 또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의 구체적인 기준으로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그에 대한 판단은 우선적으로 내가 가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빛 안에서 내려져야 하겠지요. 이를테면 나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 그리스도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신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멀리하고 끊어버리는 자세, 그러면서 내가 누리고 있는 것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자세,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내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자세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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