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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原질문의 요지는 ?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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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질문 성광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1|  
작성자이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7-08-23 조회수2,362 추천수0 신고

아래에 마르코복음 10장 18절에 대한 해석 자료를 참고하시라고 인용합니다만,

原질문의 요지는

“해석”이 아니라 “왜 예수님도 하느님과 동일하신 분이신데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고 하셨는가?”로 이해를 해보면,

 

아래 김철근님의 답글과 아래 자료들을 통해서 이 10장 시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아직 당신의 神性(신원)을 드러내실 때가 아니셨다 라는 것과,

 

한편으로는

“선하신 스승님,”호칭이 부자의 아첨에서이든지, 아니면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불렀는지 불문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다 아니다 보다는 부자의 질문의 핵심을 다루고자 부자의 호칭을 일축해버리셨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께서도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해서) 예수님께서는 죄의식을 지녔다느니 ~~하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라는 대목이

 

原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200주년신약성서 주해 : 질문의 핵심을 다루고자 부자의 아첨을 일축하시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은 죄의식을 지녔다느니 혹은 인간은 본성이 사악하다느니 하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선하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시려는 예수님의 결의가 은연중 강하게 엿보인다.

 

마르코복음해설서 “예수님을 따라” : 예수께서는 먼저 그가 당신을 부른 “선하신 스승님”이란 호칭을 문제삼으신다. 유다보다 그리스 문화권에서 주로 쓰였던 호칭이지만 부정적 느낌은 아니다. 그는 스승으로 예우하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겠지만, 예수께서는 “선하다”는 말을 신중하게 쓰라고 이르신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善에 대해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는 이 말에는, 어느 사람도 온전히 선하지 않다는 뜻이 배어 있다. ‘선하다, 착하다’는 말은 흔히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정해진 규정과 계명을 잘 지키는 경우에 쓰인다. 그렇다면 혹시 예수님께서는 계명 준수가 갖는 善의 한계를 시사하시는 것이 아닐까?

 

[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26)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18)

 

계명 준수를 넘어 그 의미 실천해야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길을 떠나는 예수님께 달려와 묻습니다. 루카 복음은 이 사람이 권력가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가르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이 표현은 그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예수님께서 나열하시는 계명은 모두 이웃 안에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은 주님의 기도처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세 계명은 하느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들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명입니다. 반면에 나머지 계명들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인간들의 상호관계 안에서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계명들은 모두 인간관계 안에서 필요한 것들이기에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요약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는 이에게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 안에서 필요한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에 맞추어져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는 경신(敬神)의 차원에 대한 강조라기보다 이웃들 안에서 필요한 실천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온 이 젊은이의 대답은 이 이야기가 전해 주는 것이 단순히 계명을 지키라는 내용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유다인들에게 계명과 율법은 중요한 것이었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좋은 길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것은 단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젊은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유다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의 뜻은 문자적인 계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을 넘어 그 의미를 이웃들 안에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재물이 많았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합니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낙타가 비슷한 그리스어 표현인 밧줄일 수 있다고 보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에 낙타가 무릎으로 지날 수 있는 ‘바늘귀’라는 성문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의미는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해석들은 더 이상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낙타와 바늘귀, 당시에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동물과 일상생활에서 가장 작은 것과의 비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부자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고 그 어려움을,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부자는 구원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젊은이에게 지키도록 말씀하신 계명이 모두 이웃 안에서의 실천과 관련되기에,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분명 공동체 안에서 이웃에 대한 하느님의 뜻에 무관심한 이들입니다. 

초대 교회 신앙인의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부와 가난의 문제는 작지 않았습니다. 신약 성경은 비교적 자주 이 문제를 언급합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 역시 구원에서 배제된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계명은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명령과 금령으로 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더 포괄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잘 드러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4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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