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토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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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3-08-20 | 조회수754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토빗 (1)
지금부터 소개할 성경 인물은 토빗입니다. 우리 가톨릭의 성경 분류에 따르면 토빗기는 역사서에 속합니다.
하지만 막상 토빗기를 읽어보면 하느님 백성의 신앙 역사의 기록이기는커녕 ‘마치 그리스 서사시와 같은 이 책이 어떻게 성경에 포함되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입니다.
사실 비록 기원전 8세기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아시리아 유배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토빗기 자신이 역사책으로 읽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듯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토빗기의 머리글은 토빗이 아시리아의 임금 살만에세르 시대에 티스베에서 니네베로 유배갔다고 합니다(1,2-3). 그러나 열왕기에 따르면 토빗이 속한 납탈리 지파가 아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는 살만에세르가 아니라 그 전 임금인 티글랏 필에세르 시대입니다(2열왕 15,29).
또한 라파엘 천사가 토비야에게 엑바타나에서 라게스까지의 거리를 두고 꼬박 이틀 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5,6), 실제로는 열흘가량이 걸립니다.
이 단편적인 예들만 보더라도 토빗기는 역사서의 기본 중의 기본인 시간과 공간마저 실제와 다르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빗기를 역사책처럼 읽지 말아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토빗기가 쓰인 페르시아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새로운 문학 양식들이 꽃을 피웁니다. 지혜문학과 미드라시가 대표적입니다.
이 중 미드라시는 ‘찾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단어 다라시에서 유래했는데, 불변하는 성경의 진리를 항상 변하고 있는 현실에 맞추어 구체적으로 풀어내어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미드라시는 할라카와 하가다의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길을 뜻하는 할라카는 그 의미대로 하느님의 백성이 따라 걸어야 할 법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할라카를 성경에 기록된 율법과 구분하여 구전 율법이라고도 부릅니다.
하가다에는 말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할라카 외의 모든 가르침, 즉 신앙적인 가르침, 윤리적인 교훈, 전설이나 민담, 삶의 지혜를 담은 금언, 기도, 역사적 자료, 이스라엘에 대한 찬양, 꿈 해석 등을 포함합니다. [2023년 8월 20일(가해) 연중 제20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토빗 (2)
하가다가 가르침을 주는 대표적인 방식은 한 인물의 극적인 삶을 이야기하며 깨달음을 얻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토빗기는 이 하가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토빗기는 가상의 시공간에 사는 토빗이라는 인물을 통해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일까요?
우선 말씀드릴 것은, 이 책을 읽다 보면 토빗보다 오히려 그의 아들인 토비야의 흥미진진한 여행기에 시선을 빼앗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책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빗기가 아니라 토비야기로 말이죠. 하지만 하가다로서 이 책의 주인공은 엄연히 토빗입니다.
그럼 토빗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먼저 토빗기의 줄거리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솔로몬 사후 남 유다 왕국과 갈라진 북 이스라엘 왕국에 속한 납탈리 지파의 후손인 토빗은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나라가 멸망한 뒤 니네베로 유배를 끌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유배지에서도 토빗은 결혼과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키고, 정결례를 행하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갑니다. 또한, 그는 많은 자선을 베풀었는데, 특히 죽은 이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에 정성을 다합니다.
이렇게 토빗은 이민족들 가운데 살면서도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 토빗은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1,3)
그런데 이렇게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던 토빗에게 큰 시련이 연이어 닥칩니다. 그는 살해당하고 무덤조차 없이 버려진 동포들의 시신을 묻어주는 선행을 베풀었는데 임금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협을 받고 모든 재산을 빼앗겨 아내의 품팔이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토빗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동포들의 장례를 돕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토빗은 이러한 선행에 합당한 복을 받는 대신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됩니다. 잠을 자던 그의 눈에 뜨거운 참새 똥이 떨어져 실명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2023년 8월 27일(가해) 연중 제2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토빗 (3)
토빗의 눈이 멀게 된 날 멀리 떨어진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사라라는 이름의 여인에게도 시련이 찾아옵니다. 사라는 일곱 번이나 결혼했지만, 매번 첫날밤 남편이 아스모대오스라는 이름의 악마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결과 저주받은 여인처럼 여겨져 여종에게조차 모욕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토빗과 사라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비록 이들이 죽음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그 속에는 하느님께서 이 상황을 바꾸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도하는 대신 자살을 선택했겠죠. 그러니 이들의 기도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청하는 기도입니다.
토빗과 사라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은 ‘하느님의 치유’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라파엘 천사를 보내 도와주도록 하십니다. 라파엘은 토빗의 아들 토비야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대로 토비야를 통해 사라와 토빗을 치유합니다.
먼저 토비야는 라파엘이 알려준 대로 여행 중에 잡은 물고기의 간과 염통을 태운 연기를 피워 사라를 괴롭히던 악마 아스모대오스를 물리칩니다. 그리고 사라와 결혼하여 돌아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토비야는 다시 라파엘의 말에 따라 물고기의 쓸개를 토빗의 눈에 바릅니다. 그러자 토빗은 시력을 회복합니다.
치유된 토빗은 평생 자선을 베풀며 의로운 삶을 살다가 112세에 죽어 장엄한 장례식과 함께 묻히고, 토비야 또한 영예롭게 살다가 아시리아의 멸망을 보고 117세에 죽는 해피엔딩으로 토빗기는 끝납니다.
이제 하가다의 주인공 토빗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토빗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토빗이라는 인물을 가장 잘 특징지을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진정 기억의 사람입니다:
얘야, 평생토록 늘 주님을 생각하고, 죄를 짓거나 주님의 계명을 어기려는 뜻을 품지 마라.(4,5)
의로운 일을 하며 영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할 것이다. 그날에 구원을 받고 하느님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한데 모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땅에서 영원히 안심하고 살 것이다.(14,7) [2023년 9월 3일(가해) 연중 제22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토빗 (4)
우리말 성경에 ‘생각’으로 번역된 단어는 기억을 의미합니다. 기억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자카르인데, 이 단어는 지난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뿐 아니라, 그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되는 현재의 행위까지 가리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합니다.
성경에도 기억이 행위를 이끄는 예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중 하나는 판관기에 나오는데, 판관 기드온의 70명이나 되는 아들 가운데 아비멜렉이 스켐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한 스켐 주민들이 그를 지지하여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도록 돕습니다(판관 9,1-6).
그러니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지금 어떤 행위를 하느냐를 규정합니다. 위에 언급한 토빗기의 구절들은 하느님에 대한 기억과 의로운 삶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기억이 의로운 삶으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토빗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나는 포로가 되어 아시리아로 왔다. 포로가 되어 니네베로 끌려온 것이다. 이곳에서 내 친척과 동족들은 모두 이민족들의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조심하여 이민족들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마음을 다하여 나의 하느님을 잊지 않았으므로(1,10-12) 살만에세르 시대에 나는 내 친척과 동족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었으며, 내 백성 가운데 누가 죽어서 니네베 성 밖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묻어 주었다.(1,16-17)
설화비평이라는 방법론을 따라 읽으면 이 두 단락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기억 때문에 토빗이 음식 규정을 지킨 것뿐 아니라 자선까지 베풀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 우리 신앙인에게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평상시 하느님을 기억하다가도 막상 시련이 닥치면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봅니다. 자신의 고통이 하느님의 부재 혹은 실패에서 비롯된 것처럼 여겨져서 더는 그분을 기억하는 일이 부질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토빗은 오히려 시련의 때에 더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 대한 기억이 구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2023년 9월 10일(가해) 연중 제23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토빗 (5)
토빗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토빗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1,8), 이스라엘의 분열을 겪어야 했습니다(1,4-5). 한 분 하느님을 섬기는 성소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현실 앞에서 토빗은 마치 부모의 이혼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와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성소인 단이 아니라 성전이 있는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난 그는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후 토빗은 유배를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고향에서 쌓아온 재산의 상실과 형성해온 인간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가족, 친구, 지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전쟁 통에 죽고, 어떤 이들은 고향에 남았으며, 어떤 이들은 유배에 끌려와 아시리아 제국의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시리아에서는 선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모든 재산을 빼앗겼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이죠. 그리고 토빗은 급기야 눈마저 멀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토빗의 부당한 불행은 아내의 부르짖음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2,14)
하느님을 의심하거나 거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토빗은 항상 하느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이 기억은 토빗이 자포자기하는 대신 하느님께 기도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응답을 끌어냈습니다. 이렇게 토빗의 기억은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토빗은 자신의 삶을 근거로 손자들에게도 언제나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유언합니다:
“이제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여라. 너희 자식들도 잘 타일러서,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게 하여라. 언제나 진심으로,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게 하여라.”(14,8-9)
토빗의 이름은 ‘하느님은 좋으시다’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대로 토빗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통해 좋으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이는 그분께서 바라시는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좋은 일을 하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2023년 9월 17일(가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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