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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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3-11-07 | 조회수750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욥 (1)
이제부터 많은 신앙인이 예기치 못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련을 겪을 때 떠올리게 되는 성경 인물인 욥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욥은 욥기 외에도 성경에 세 차례 등장합니다: “비록 그곳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따름이다(에제 14,14. 20). 여러분은 욥의 인 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야고 5,11).”
이 구절들은 욥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그의 이야기 또한 실제로 벌어졌던 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많은 학자는 욥은 가공의 인물이며, 그의 이야기 또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심지어 유다 전통도 중세부터 욥기를 하나의 비유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욥기를 단순히 성인전을 읽듯이 할 수는 없습니다. 욥의 삶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욥기는 시작서부터 욥을 그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1,1).”
성경 인물 가운데 누구도 이와 같은 놀라운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완벽한 사람이 욥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 소리(마태 3,3)인 것처럼, 욥은 인류 전체의 영원한 주제인 고통에 대한 목소리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고통은 의인의 고통입니다. 악인의 행복이라면 몰라도 악인의 고통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인격체라기보다는 목소리라는 점, 이것은 그의 인생사, 그가 겪은 여러 사건 자체보다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얼핏 보면 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하고 명료해 보입니다. 즉, 그는 비록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어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넘치게 보상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요?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실제 삶에 비추어 보면 이 가르침은 지나치게 순진해서 덥석 받아들이기 어렵죠. 어린아이들에게나 통할법한 가르침입니다. 항상 이 가르침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아무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욥기 전체의 유일한 결론으로서의 이 가르침의 실효성에 대하여 욥기 자신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 가르침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욥기의 결말은 꼼꼼히 읽어보면 해피엔딩으로 보기 힘듭니다. [2023년 11월 5일(가해) 연중 제3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욥 (2)
욥의 사회적, 물질적, 가정적 회복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운명을 되돌리셨다. 주님께서는 욥이 전에 소유하였던 것을 갑절로 더해 주셨다.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과 옛 친구들이 모두 그의 집에 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주님께서 그에게 들이닥치게 하셨던 모든 불행에 대하여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며, 저마다 은전 하나와 금고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 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마리와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42,10-13).”
욥은 심지어 장수의 복까지 받습니다. 시편 90,10에 따르면 인간 수명은 평균 70세인데, 욥은 이후 그 두 배인 140년을 더 삽니다(42,16).
그런데 여기서 거슬리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욥이 잃은 가축을 다시 얻은 것과 새로운 자녀를 얻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가축은 대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날한시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자녀들도 대신할 수 있나요? 더 똑똑하고 잘생긴 아이가 태어나면 이전에 죽은 아이가 잊히나요? 이렇게 엄청난 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욥이 감사의 말씀을 단 한마디도 드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욥의 회복에 대한 묘사에 뭔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진 것 같지 않습니까? 욥의 치유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을 단순한 실수로 봐야 할까요? 욥의 병은 그렇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병은 욥에게 주어진 일련의 고통의 정점에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고통과는 확연한 차별을 보입니다. 병은 재물이나 주변 인물이 아니라 욥 자신을 해친 유일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병은 인간이나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탄이 직접 욥에게 가한 유일한 고통입니다.
그리고 이 병으로 말미암아 욥기의 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욥은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2,8).” ‘잿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라는 표현은 병이 드디어 그 모든 시련에도 굳건하던 욥을 절망에 빠지게 하고 죽음의 충동을 느끼게 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욥은 입을 열어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2장으로 끝날 수 있었던 욥기가 42장으로 대폭 확장되는 순간이죠.
그러니 욥의 치유가 빠진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부르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미 욥기의 첫 독자들도 이 부분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래서 외경 ‘욥의 유언’은 하느님께서 마법의 허리띠를 주어 그것으로 욥의 병을 고치게 하셨다는 말씀을 첨가합니다. [2023년 11월 12일(가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욥 (3)
이렇게 볼 때, 앞서 언급한 욥의 순수한 가르침을 욥기의 결론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욥기 속에서 욥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욥기를 꼼꼼히 읽어보신 분은 벌써 눈치채셨을 수 있는데, 이 책은 크게 산문부와 운문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의 틀을 형성하는 ‘이야기 부분’의 욥의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대화 부분’의 욥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야기의 욥’은 순종하는 혹은 하느님 중심적인 욥, ‘대화의 욥’은 반항하는 혹은 인간 중심적인 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욥기에는 ‘욥의 목소리’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목소리,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 세 친구의 목소리, 엘리후의 목소리 등 ‘다양한 목소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들은 고통에 대한 여러 이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전통적인 ‘고통 신학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 신학들을 하나씩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의인이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변덕스러움이나 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심이 하느님의 복을 받아 마땅한지 검증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인간의 거짓 신심에 속아 복을 내린다면 그런 하느님은 무능할 뿐 아니라 정의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고통은 시험의 의미를 지니기에 대상을 완전한 파멸로 이끌지는 않으며, 그 신심의 진실함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면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받게 된다.
2. 의인의 무고한 고통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 고통은 악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초윤리적(超倫理的)인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하고, 따라서 반드시 선에는 복, 악에는 벌이 따르는 보상적 정의는 없다.
3. 하느님은 정의로우시기에 보상적 정의는 굳건한 불변의 원칙이며, 모든 고통은 자신이 인지하고 인정하든 아니든 지은 죄에 합당한 대가다. 드러나지 않은 죄인의 고통은 있을지언정 의인의 고통은 없다는 말이다.
4. 유한한 인간은 초월자인 하느님의 지혜에 닿을 수 없으므로 하느님이 어떤 원칙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의 의미도 알 수 없다. [2023년 11월 19일(가해)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욥 (4)
5. 하느님의 모든 행위는 정의에 부합한다. 다만 초월적 지혜를 통해 구현되는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이 생각하는 상선벌악과 같은 단순한 보상적 정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데, 인간은 하느님의 이러한 정의를 이해할 수 없기에 때로는 하느님의 행위가 정의롭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6. 모든 고통이 징벌적인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며 그 가운데는 훈육을 위한 것도 있다. 이러한 고통은 죄인의 멸망이 아니라 회개를 위해 주어지는 것으로서, 전형적 죄인이 아니라 “의인도 일곱 번 쓰러진다”(잠언 24,16)는 말씀처럼 의롭게 살다가 죄를 짓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고통의 의미에 관한 이 다양한 이해 가운데 어느 것이 결론 혹은 정답일까요? 만일 여러분이 ‘주여, 왜?’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해석을 통해 위안받고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사실 고통의 의미에 대한, 이 설명 가운데 어느 것도 모두를 완전히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욥기에서도 그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의미를 절대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욥기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을 주지 않습니다.
욥에게서 고통의 궁극적인 해답을 기대하셨던 분은 실망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욥기는 도대체 왜 읽어야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통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종교, 철학, 문학을 막론하고 한 번도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음이 보여주듯 인간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 문제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문제는 영원히 풀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지 않을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욥기는 우리가 이 고통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욥기는 우리가 지독한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고통은, 특히 제 탓이 없이 주어지는 고통은 삶의 의미를 완전히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기는 고통에 대한 답을 가져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찍이 끝나버렸을 수도 있는 욥의 삶이 그가 하느님을 향해 입을 열어 부르짖기 시작하면서 다시 이어지게 되었듯이, 끊임없이 하느님께 고통의 의미를 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고통 중에서도 살 수 있게 된다고 욥기는 말합니다. [2023년 11월 26일(가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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