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임금이신 하느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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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3-11-07 | 조회수373 | 추천수0 | |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임금이신 하느님
1사무 8,7에는 ‘이스라엘이 당신을 배척하여 더 이상 임금으로 모시지 않으려 한다’는 주님의 꾸짖음이 나옵니다. 이는 사무엘 시대에 백성이 ‘라마’에 모여 왕정을 요구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사무엘의 고향(1사무 7,17)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왕정이 세워지기 전에도 ‘판관’을 백성의 지도자로 주셨는데, ‘임금’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질책하신 걸까요? 왕정의 세습을 문제로 지적하신 거라면, 사무엘도 두 아들에게 판관 자리를 물려준 바 있습니다(8,1-2).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시나이산 아래에서 주님과 계약을 맺을 때, 오직 주님만 섬기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후, 그들은 주님께서 다스리시는(탈출 23,24-25) ‘사제들의 민족’(19,6)으로서 타 백성과 구별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연이어 승리를 안겨주시는 분도 하느님이라 생각했습니다(신명 20,1-4; 판관 4,14; 1사무 7장 등).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믿음에 지상의 임금을 ‘또 다른 주군’으로 섬겨야 하는 왕정의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주변국들처럼 왕정을 세우겠다는 주장은, 하느님을 더는 유일한 임금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뜻과 진배없었습니다.
판관 시대에 판관과 백성은 주종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판관을 보내주신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주종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왕정이 수립되면, 사무엘의 경고(1사무 8,17)처럼 임금과 백성은 주종 관계가 될 거였습니다. 이렇게 백성이 왕실의 종이 되면, 이집트 종살이 시절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이는 왕정이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체제임을 말해줍니다.
사무엘은 왕정이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거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왕정이 성공적일수록 임금은 큰 힘을 얻어 백성을 쉽게 수탈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왕정은 한 번 확립되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왕실과 귀족의 수탈이 지속되면 민심 이반이 일어나 나라가 분열되고, 결국 주변 나라들처럼 흥망성쇠를 겪고 망하리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주님과 맺은 계약에 기초한 공동체는 율법의 정신에 따라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지만, 특권층을 양산하는 왕정은 평등 사회를 파괴합니다. 왕정의 부작용에 대한 예고는 이후 현실이 되어, 예언자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통치자들을 질책하였습니다(예레 23,1-2; 에제 34,1-10; 아모 6,1-7 등). 그들의 노력에도 끝내 남북왕국은 모두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왕정을 허락하신 건, 훗날 이 체제가 어떻게 흘러갈지 미리 아시고 결국 당신께서 의도하신 방향으로 돌아올 것을 헤아리신 까닭이 아니었을까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성자가 만왕의 왕이 되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유일하게 임금이시던 시절로 되돌려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변인으로서 왕정의 폐해에 대해 경고했던 사무엘은 고향 라마에 잠들어, 마침내 원래대로 돌아온 이런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는 듯합니다.
* 김명숙 소피아 -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구약학과에서 공부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님성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며, 저서로는 <에제키엘서>와 <예레미야서 1-25장>, <예레미야서 26-52장>, <구세사 산책; 에덴에서 약속의 땅까지>가 있다.
[2023년 11월 5일(가해) 연중 제31주일 의정부주보 2면, 김명숙 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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