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의 용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2)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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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기 | 작성일2019-01-03 | 조회수2,941 | 추천수0 | 신고 | ||||||||||||
3. 구속(救贖)과 믿음
성경에서 '믿음'에 관하여 기록한 책은 많이 있지만, 특별히 믿음과 구속의 관계를 증언하는 책은 바오로가 쓴 로마서, 갈라티아서, 필리피서 등의 서간문들이다. 그런데 이 세 서간문에서 총 67번의 '믿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바오로는 이 중에 ‘하느님의 믿음 (1번),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7번) 을, 그리고 나머지는 ‘인간의 믿음’으로 구분하여 성경에 각각 다른 의미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이 믿음들을 구별없이 모두 ‘인간의 믿음’으로 이해하였고,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구속된다는 “이신 칭의” 교리를 만들어 오늘에 이른다. 그런데 믿음과 구속의 관계에 대해, 루터는 바오로의 가르침과는 다른 주장을 내 세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오로가 세 서간문들에서 믿음을 '하느님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그리고 '인간의 믿음'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는 반면, 루터는 이 믿음들을 구분없이 모두 ‘인간의 믿음’이라고 보았다. 둘째, 바오로는 '예수님의 믿음'을 구속(Redemption)의 기본으로 보는 반면, 루터는 ‘인간의 믿음’만을 구속의 원인 행위로 꼽았다. 셋째, 구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죄를 처단한 육적개념과(에페1,7; 로마8,3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인간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하느님께서 의로움으로 인정해 준다는 지적인 개념으로 구분되는데, 루터는 '인간의 믿음' 만으로 구속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구속의 육적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A. Schweitzer, The Jones Hopkins University Press 참조).
인간이 하느님으로 부터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된 ‘구속’의 신비를 놓고 가톨릭교회에서 구성한 교의(Dogma)는 의화, 개신교회에서는 이신 칭의 또는 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 부른다. 그러나 같은 하느님의 구속사업을 놓고 그 내용을 보면 서로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 정의하는 의화는 인류의 원조와 인간들이 집단으로 지은 원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전에 인류가 범한 모든 본죄 뿐아니라 죄벌까지도 예수께서 대속(代贖)하여서 인간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의롭게 된 일련의 과정이라고 본다. 즉 가톨릭교회의 구속모델은 구약 창세기 3장15절의 "원 복음"을 기점으로 해서 아브라함의 부르심,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난 일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통한 인간 죄들의 속량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게 된 “점진적인 변형(Progressive Transformation)”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에 개신교에서 정의하는 ‘이신 칭의’는 인간이 의롭게 된 것은 과정이 아니라 법정의 선고문 같은 순간적인 하느님의 ‘법정적 선언(Forensic Verdict)’이며, 이는 인간이 본성상 죄인이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아 의롭다고 선언해 주는 것 뿐이어서, ‘칭의’로 인해 죄인인 인간이 실제로 의롭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이유(理由)로 해서 마르틴 루터는 인간이 ‘의로우면서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면 구속에 관하여 신약성경의 다른 서간문들에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1,7).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1코린1,30).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5,17).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증언하면서,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2코린5,17). 이 ‘새로운 피조물’을 주석 성경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 진다."로 해석한다. 또 히브리서 2장10절에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루터가 정의를 내린 ‘의로우면서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느님으로 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지만, 내면에는 과거의 죄성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그래서 바오로가 정의하는 "새로운 창조" 논리와는 일치하지 않는 주장이어서, 나는 평소 루터의 논리가 애매모호하고, 성경의 기록과는 배치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와중에 "바오로에 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논자들" 중의 한 사람인 영국의 개신교 신학자인 제임스 던(James D.G. Dunn)이 루터의 "이신 칭의"교의에 흠결이 있음을 지적 하고 나선 사건이 최근에 발생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바울 신학>>에서 로마서, 갈라티아서 및 필리피서에 구속의 동인(動因) 으로 간주되고 있는 헬라어 ‘Pisteos Christou’(그리스도의 믿음) 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피스투스 크리스투(Pisteos Christou)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써 이 어휘를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원하여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보여 준 순종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바울신학, 제임스 던,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524쪽 참조)"
제임스 던의 논박에 의하면, 위에 언급한 바오로의 세 서간문 즉 로마서(3,22; 3,26), 갈라티아서(2,16; 2,20; 3,22), 필리피서(3,9) 에 기록한 헬라어 ‘피스투스 크리스투(Pisteos Christou)’ 는 라틴어로 “fidem Jesu Christi” 로 번역되며, 이는 '그리스도 자신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마르틴 루터가 이 어휘를 ‘예수를 믿는 인간의 믿음’으로 해석한 것은(우리말 성경을 포함한 일부 영어 성경에는 인간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오류이며, 이를 기초로 만든 ‘이신 칭의’교리 또한 오류임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이 바탕이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루터가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주요 교의”라고 금과옥조로 여겨온 “이신 칭의” 가 집안 내부에서 공격을 당한 샘이어서, 완전무결 해야 할 교의(Dogma)가 시비의 대상이 되었으니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격이 되었다. 아직 제임스 던의 반박 논리에 대해 개신교회에서 공식적인 입장은 내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평소 인류의 원죄를 포함한 죄들의 용서인 구속의 Mechanism에 대해 관심이 많아 신학원에서 성경을 연구한 바 있는 나로서는 제임스 던이 주장하는 논리가 보다 더 성경에 부합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 이유를 성경의 말씀을 바탕으로하여 검증해 보고자 한다.
하느님의 인간 구원계획은 크게 창조/구속/성화의 위업으로 나눌 수 있다. 구원계획의 두번째 피앗(Fiat)인 구속과 관련하여, 구속과 믿음의 관계를 기록한 서간문들 특히, 성 바오로가 쓴 신약성경 로마3,22.26; 갈라2,16.20; 3,22; 필리3,9 등에 나오는 일곱 번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이 구속론의 원초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특히 육적개념, 주석성경, 신약, 699쪽 및 바울신학, 제임스 던,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524쪽 참조). 이들 '믿음'에 대해 성 바오로가 성경에 적용한 ‘믿음’은 헬라어(그리스어) “Pisteos Christou” (또는 라틴어 “fidem Jesu Christi”) 로써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으로 번역된다. 즉 이 믿음은 주석성경이 정의를 내리고 있듯이 목숨까지 내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서로 차원이 다른 믿음이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예수님의 순종)인 반면,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굿윈은 그의 저서 <<믿음의 본질>>에서 믿음을 ‘일반 믿음’과 ‘특별한 믿음’으로 구분하고, 인간 구속을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일반 믿음과 구분하여 ‘특별한 믿음’이라 부르기도 한다(토마스 굿윈. 믿음의 본질, 부흥과개혁사, 587쪽 참조).
그러면 구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연결고리를 검증해 보기로 한다. 예를 든 이들 성경 장절 중에 세개를 선택하여, 로마서3장26절, 갈라티아서 2장16절 및 필리피서3장9절의 라틴어 및 영어 성경과 한글 번역을 비교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로마서3장26절
라틴어 : in sustentatione Dei, ad ostensionem iustitiæ eius in hoc tempore: ut sit ipse iustus, et iustificans eum, qui est ex fide Iesu Christi.
영어번역: to reveal his justice in this time, so that he himself might be both the Just One and the Justifier of anyone who is of faith of Jesus Christ.
한글 번역 :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나. 갈라티아서2장16절
라틴어: Scientes autem quod non iustificatur homo ex operibus legis, nisi per fidem Iesu Christi: et nos in Christo Iesu credimus, ut iustificemur ex fide Christi, et non ex operibus legis: propter quod ex operibus legis non iustificabitur omnis caro.
영어번역 : And we know that man is not justified by the works of the law, but only by faith of Jesus Christ. And so we believe in Christ Jesus, in order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of Christ, and not by the works of the law. For no flesh will be justified by the works of the law.
한글번역 :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된다는 사실을 우리는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믿게 되었습니다.
다. 필리피서3장9절
라틴어 : et inveniar in illo non habens meam iustitiam, quæ ex lege est, sed illam, quæ ex fide est Christi Iesu: quæ ex Deo est iustitia in fide
영어번역 : and so that you may be found in him, not having my justice, which is of the law, but that which is of faith of Christ Jesus, the justice within faith, which is of God.
한글번역
율법에서 오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위에 라틴어/영어/우리말 번역에서 볼수 있듯이, 신약성경이 쓰여진 언어인 헬라어(그리스어) "Pisteos Christou" 를 라틴어 및 영어로는 각각 “fidem Jesu Christi”와 ‘faith of Jesus'로 번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말 성경은 이들과 는 달리 유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또는 '예수님을 믿는' 이라고 하여,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의 믿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한글 번역을 참고바람.). 따라서 이들 한글 번역은 잘못된 것이며,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또는 '그리스도의 믿음' 으로 번역해야 바른 번역이라고 판단된다. 앞서 언급을 한 바와 같이 개신교 내에서도 James Dunn 이 "오직 믿음' 교리의 근간이 된 7차례의 라틴어 'fidem Jesu Christi' (헬라어 "Pisteos Christou")를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인간의 믿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는 신학자들의 지적이 나옴으로써 그 해석을 놓고 서로 맞느니 틀리느니 하면서 현재 집안 싸움 중이다. 이 잘못된 번역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현재가지 500년간 믿어온 개신교의 "오직 믿음' 교리가 일시에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극히 일부 학자에 따라서는 헬라어 “Pisteos Christou”가 주격적 소유격이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해석), 또는 목적격적 소유격('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석) 등 양쪽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그러한 주장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놓고 볼 때 구속의 본질을 흐리게 할 뿐, 정답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과연 하느님은 '인간의 믿음' 때문에 인간을 의롭게 하셨느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을 통하여 인간을 의롭게하셨는지 두 어휘의 의미를 좀더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vs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인간의 믿음)
신약 성경에서 구속의 대 전제는 로마서 5장19절에 기술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다(주석성경, 갈라2,16의 주석 참조). 즉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라는 구절의 문장 뒤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한 사람의 순종"을 일컫는다. 이러한 대 전제를 기반으로하여 성경에 기록된 구속의 정확한 정의는 바오로가 쓴 에페소에서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1,7)”
이와 같이 성경에서 구속의 의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피로 인류의 죄들을 속량한 육적인 개념(quasi-physical conception)을 구속의 기본 원리로 기록하고 있다. 인간이 속량되기 위한 Mechanism은 예수의 성혈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스스로 목숨까지 내어 놓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의 공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성취한 구속의 Mechanism 은 이러하다. 예수가 모친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 되자, 동시에 하느님은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옮겨 주었다(콜로1,13-14; 에페1,10). 그리하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를 이루게 되었고(1코린12,27), 이때에 인간의 죄가 예수께로 전가되었다(Imputation of sin)(이사53,6). 예수는 자신에게 전가된 인류의 죄악들을 그분 안에서 그분의 피로 씻음으로써, 인류의 죄가 속량되어 의롭게 되었고, 이어서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인간이 받아야 할 죽음을 대신하여 보속(Satisfaction)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시점부터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지속적인 속량(Redemption)을 의미한다(로마3,24). 그래서 예수는 마리아 태중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처형 당할 때까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다녔다(요한1,29).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속은 ‘인간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준행한 인간 구원계획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예수 강생 이전인 과거 뿐 아니라 현재 및 미래에 태어날 모든 인간의 죄들을 용서하였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들 모든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옮겨주어(콜로1,13) 구속사업을 준행하였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분 안에서 재창조(거듭남)가 이루어진 것이다(2코린5,17).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한 말은 모든 인류의 죄를 없앤 구속 사업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요한 19,30). 뿐만아니라 과거 현재와 미래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죄가 인류 후손에게 유전되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인간이 태어나면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그분이 하실 일은 인간의 죄를 없애는 구속 사업이 아니라, 하느님 구원계획의 마지막 피아트(Fiat)로 발해지는 종말의 성화사업이다(로마5,9).
따라서 루터가 '인간의 믿음'만으로 구속된다고 하는 주장은 사도 바오로의 가름침이 아니다. 전적으로 루터의 자의인 해석때문이다. 로마서(3,22; 3,26), 갈라티아서(2,16; 2,20; 3,22), 필리피서(3,9) 등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인간의 믿음'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 엉터리 신앙의 발단이다.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덕분이라는 사실 이외에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믿음’은 구속의 원인행위가 아니라, 구속의 혜택을 받는 통로에 불과하다(갈라2,16ㄴ 참조). 즉 인간의 믿음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을 구속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구속을 성취함으로써( 예수님이 살아 았을 때에 구속이 완성 되었음) 인간의 죄악들이 용서된 것이고, 인간은 그 구속의 혜택을 "믿음"을 통하여 받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믿음을 의롭다고 하느님으로 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다(로마4,22-24). 즉 인간의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통로에 불과하다. 혹자는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 1장17절을 읽고 개신교의 ‘오직 믿음’ 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구절은 바오로가 구약성경 하바쿡서 2장4절 인용한 것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내용인데, 이 믿음은 원래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의 "성실함"을 의미한다. 하바꾹 예언서가 쓰여진 배경을 보면 기원전 660년-610년 사이 칼대아 군대의 원정, 유다 점령, 그리고 예루 살렘의 포위와 유배 등 유다 왕국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것인데, 역사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시는 하느님을 거슬러 하느님께 올린 탄원에 대한 응답이 하바꾹 예언자에게 주어진다. 곧 그 핵심 낱말로써 하느님의 "성실함(faithfulness)"이 나온다. 이 성실함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하느님의 성실함에 관한 환시로써 그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신다는 신탁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하느님의 성실함을 확장시켜 믿음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구속은 인간의 노력이나 믿음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거저 베푸신 구원계획의 일환이다(로마3,24). 그러니 하느님의 구속사업이 '인간의 믿음' 때문이라고 인간의 공로를 내 세우는 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행위이다. 바오로는 그래서 인간이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지 말라고 충고한다(에페2,9). 이를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구속의 동인으로써, 그리고 '인간의 믿음'은 구속에서 오는 혜택을 받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요약할 수가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올바른 신앙인으로써 살다 간 우리나라의 한 개신교 목사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 강남에 사랑교회를 세운바 있는 고 옥 한흠목사에 관한 일화이다. 그분이 작고하기 전 “평양 대 부흥운동” 100주년 집회에서(2007년) 설교 도중에 갑자기 강단에서 신자들 면전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유는 지난 수십 년간 교회를 키울 손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하는 교리를 신자들에게 선포하여, 그들을 잘못된 신앙으로 인도하였다는 양심고백으로써,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과 신자들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개신교에서 흔히 말하는 구원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죽어서 심판을 면하고 천국로 직행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나 이는 잠못 된 신앙이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구원은 종말의 심판의 때에 완성된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믿음이 천국행을 보장한다는 의미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의 구원은 각 개인들의 행실과 믿음을 보시고 종말의 심판날에 가서 예수님이 결정하시기에 (묵시20,13), 믿기만하면 천당간다고 신자들을 유혹하는 말들은 모두 엉터리 교사들이 하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이미4세기 전에 경건주의 운동을 펼치며 "오직 믿기만하면 구원된다."는 교리가 살아졌음에도, 우리나라의 유수한 개신교 교회에서는 지금 이시각에도 "오직믿음=구원" 도식을 부르짖고 있다. 사울(회심 전의 바오로)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회심 사건을 통해서(사도행전 9장 참조) 묵시 사상의 종말론을 재해석함으로써 종전의 묵시적 종말론을 크게 수정하게 된다. 세상의 종말인 하느님 구원 계획의 완성의 때에 일어나야 할 사건들이 현세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예: 예수님의 부활).
종말론적인 부활의 첫 번째 행위가 종말의 완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역사 속으로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은 이중적인 경험을 겪게 된다. 예수님의 강생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는 두 시대가 겹친다. 즉 신자들은 아직 옛 시대 가운데 살고 있는데, 벌써 내세가 도래한 것이다. 그들은 구속되었으나 현세의 삶은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는 경험된 종말(이미 - 구속사건)과 다가올 종말(아직 -최종 구원)의 긴장 가운데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에게는 구원의 두 시제가 존재한다. 로마서 5~8장에서 이 두 시제에 의한 바오로의 종말론적 긴장으로서 이미-아직(already, but not yet)이 강조되고 있다. 바오로의 “이미-아직”의 종말론적 긴장은 바오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중간점과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과정에 대한 바오로의 근본적인 사상은, 신자는 아직 목표점인 최후의 구원(성화)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아직 온전하지 못하고 항상 변화 중에 있다는 것이다. “시작된” 일과 “완결되지 않은” 일, “이미”와 여전히 앞으로 다가올 “아직” 간의 “긴장(tension)”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오로의 구원 도식에 함축되어 있는 종말론적 긴장은 그의 구원사상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바오로의 구원론의 본질인 이런 삶의 긴장관계의 이해없이 "나는 구원받았네!!" 하며 박수를 치고 열광하는 것은 값싼 구원론에 현혹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부도덕하고 끔찍한 일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 특히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영혼없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오로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바오로의 윤리적 권고나 믿는 자에 대한 충고들이 바오로 서간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로마서12장-16장 참조). 결론적으로 슈바이처 박사가 강조하듯,
"종말론적인 긴장’을 바오로 신학에서 제거해 버릴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바로 믿음만을 부르짖는 신앙이고, 종말론적 대망에서 사랑을 전제로 탄생한 바오로의 윤리사상을 간과하게 되었다.(사도 바울의 신비주의, 알베르트 슈바이쳐, 한들출판사, 595쪽 참조)"
현세에서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일치시키는 구원은 종말에 성화의 때에 완성된다. 영원한 구원은 내가 확신을 갖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희망하는 것이며(1테살5,8), 최후의 심판날에 전적으로 예수님의 결정과 권능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성화)는 예수께서 취하시는 심판에 따라 각 개인적으로 결정 될 문제이지(에페1,4-12; 사도17,31; 1베드4,5; 히브6,2 참조), 인간의 믿음만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매주 본당에서 실시하는 성령기도회에 참석하는데, 가끔 가톨릭 말씀 봉사자가 와서 기도회 시작하자마자 "여러분,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만약에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렇게 믿음이 부족하냐? 개신교 신자들 본 좀 받아라!!" 고 하며 천주교 신자들의 구원론을 탓할 것 같은 위세이다. 마치 개신교 신자들 집회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분은 말씀 연구를 많이 했지만, 구속과 구원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로써 올바른 구원론은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성혈로 구속은 받았으나(죄의 용서는 받았으나), 다가올 심판날에 구원(성화)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내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최종 구원(성화)의 결정권을 가지신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구속의 혜택은 죄의 용서와 더불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의롭게 된 것이다. 성령에 따른 새 생명과 새 삶이 이 의로움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우리 말 성경 바오로의 세 서간문 중에 인간이 '자신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번역은 오역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주석성경에서 구속 혹은 속량에 관한 해석을 보면,
“구속 혹은 속량은 하느님께서 당신백성에게 베푸신 구원계획의 일환으로써, 곧 이집트 종살이에서(신명7,8; 15,15), 바빌론 유배 살이에서(이시41,14; 43,1 등), 그리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죄에서 구해 주신 것이다(시편130,8). 이러한 메시아적 속량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으로(1코린1,30; 콜로1,14) 죄의 용서를 뜻한다(에페1,17; 콜로1,14). 또 “속량이라는 개념의 배경에는 죄인이나 수인 또는 노예나 포로를 풀어주려고 지불하는 몸값의 의미가 깔려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서 값을 내고 산 또는 되산 이들이라고 자주 말한다(1코린6,20; 7,23; 갈라3,13; 4,5). 그러나 이 표현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속하고 죄와 죽음의 노예 살이와 포로 살이에서 해방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구속을 위하여 지불된 값을 상기시키는 것은 (1코린6,20; 7,23), 하느님께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내 놓아 이루신(로마5,8; 8,23) 구속의 값진 성격을 강조하려는 것이다.(주석성경, 신약, 565쪽)"
로마서 5장부터는 구속을 과거 시제로 기술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구속 사업은 '인간의 믿음'이 있기 전에, 인류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주어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살게 하였다(콜로1,13; 1코린1,30 참조).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의 죄를 씻으시고(로마8,3ㄴ; 에페1,7), 예수의 인성 안에 그들을 품고 다니면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그들과 함께 못 박혔다(갈라2,19). 따라서 하느님의 구속사업은 ‘인간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믿음에 선행(先行)하여 성취하신 거룩한 업적이다. 참고문헌: 성경, 루터선집 제3권(마르틴 루터), 바울신학(제임스 던),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A. Schweitzer), The Book of Heaven(Luisa Piccarreta), 신국론(아우구스티누스), 교부들의 성경주해(분도춢판사), 기독교 강요(칼빈), 믿음의 본질(토마스 굿윈), 순전한 기독교(C.S. Lewis), 경건한 열망, 교회개혁을 위한 제안들(필립 야콥 슈페너), 존 머레이 구속(존 머레이), 공동구속(졸저),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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