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타마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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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3-12-05 | 조회수620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타마르 (1)
어느덧 성경 인물 이야기 구약편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이름이 밝혀진 이들의 수만 해도 2천여 명이나 되니 너무 아쉽고 부족합니다. 더 많은 성경 인물과의 만남은 독자 여러분 각자의 몫으로 남겨드리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있는 구약의 여인들, 즉 예수님의 할머니들 가운데 타마르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타마르의 이야기는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 가는 이야기와 파라오의 경호 대장 포티파르의 부인에게 유혹당하는 이야기 사이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잘못된 곳에 들어가 이야기의 맥락을 끊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연관된 점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다와 요셉 모두 아버지와 형제들에게서 떨어졌습니다. 유다와 요셉 모두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유다는 타마르를 알아보지 못했고,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타마르와 포티파르의 아내 모두 유혹자입니다. 타마르는 자신의 과부 옷을 벗었고, 포티파르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런데 독자들은 포티파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가문에서 왕좌가 이어지고 메시아가 날 것을 기대하겠지만, 하느님은 놀랍게도 창녀라고 여겨진 타마르의 유혹에 넘어간 유다를 선택하십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곧잘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유다 가문에서 다윗 왕조가 일어나고, 그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마르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타마르는 불행한 운명을 겪은 여인입니다. 고대 관습대로 타마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다의 맏아들 에르에게 시집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르는 악했습니다. 에르는 그 이름조차 악이라는 뜻의 ‘라아’를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악한 에르가 천벌을 받아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유다는 타마르를 둘째 아들 오난과 재혼시킵니다. [2023년 12월 3일(나해) 대림 제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타마르 (2)
이 관습이 매우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신명기 25장은 형사취수(兄死娶嫂) 제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을 때 아우가 형수와 재혼하여 대를 이어주도록 하는 이 제도는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아메리카 대륙, 고구려 등에서도 행해지던 것으로, 형제가 없을 경우는 가까운 친척이 이 의무를 이행하기도 했습니다.
형사취수제에 따라 오난과 재혼시킬 때도 유다는 마치 그의 의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타마르에게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재혼 또한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오난 또한 형처럼 악했기 때문입니다.
오난은 형의 재산(맏아들의 몫인 유다 전 재산의 절반)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했기에 타마르가 아들을 잉태하지 못하게 하여 천벌을 받아 죽습니다.
타마르와 결혼한 두 아들이 모두 죽자, 유다는 아들들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타마르를 마치 죽음의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여겨, 막내아들 셀라마저 잃을까 두려워 타마르를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이렇게 타마르는 생과부 신세가 됩니다.
하지만 타마르는 죽은 사람처럼 절망에 빠져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셀라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자신을 부르지 않자, 위험천만한 일을 계획합니다. 유다가 양털 깎는 축제를 지내러 간다는 말을 듣고 그를 통해 아들을 얻을 작정을 한 것입니다.
레위 18,15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간음으로 여겨졌는데, 간음죄의 심각성은 창세 38,24에서 타마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유다가 화형에 처하려고 한데서도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처사는 과한 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간음죄를 저지른 이는 투석형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21,9에 따르면 제사장의 딸이 간음했을 경우만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만큼 유다의 분노가 컸다는 말이겠습니다.
유다는 제가 한 일은 까맣게 잊고 타마르만 탓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타마르는 이렇게 자기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아이를 갖기를 원합니다. [2023년 12월 10일(나해)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타마르 (3)
유다를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다는 타마르를 일반적인 창녀(조나)가 아니라 신전에서 봉사하는 창녀(케데샤)로 오해하여서 관계한 것 같습니다. 가나안에서 신전 창녀와의 교합은 다산과 풍작을 비는 종교적인 행위였습니다.
또한, 유다에게 있어 타마르와의 만남은 축제의 분위기에 휩쓸린 우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애초에 창녀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화대로 지급할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서 드러납니다. 타마르는 종려나무의 뜻을 가진 이름인데, 타마르가 그 이름대로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서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려나무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단단하고 생명력이 강하기도 합니다. 타마르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나약한 여인이 아닙니다.
타마르는 유다에게서 화대 대신 받은 담보물(당시 신분증의 역할을 하던 원통형 인장, 인장을 목에 거는 가죽 줄, 고유한 조각이 새겨진 지팡이)이 아니면 증언의 효력조차도 갖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음에도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입니다.
타마르는 과부가 아닌데도 강제로 입혀진 과부의 의복을 과감히 벗어 던졌습니다. 이 의복은 남편을 둘이나 죽이고도 아들을 얻지 못한 저주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사실 책임은 타마르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죠. 그러니 타마르가 과부의 옷을 입는 것은 부당합니다.
또한, 타마르는 유다를 변화시킵니다. 앞서 유다는 다른 형제들이 야곱에게 요셉의 죽음의 증거인 의복을 확인하라고 할 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실도 말하지 않은 채 침묵했습니다.
화형당한 위기에 처한 타마르는 그런 유다에게 자신이 준 징표인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이전처럼 또 침묵할 건가요? 그래서 아버지에게서 삶의 희망을 빼앗은 것처럼 제 목숨을 빼앗을 건가요?”라고 묻는 듯합니다. 타마르는 유다에게 진실 앞에 침묵함으로써 저질렀던 죄를 만회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2023년 12월 17일(나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타마르 (4)
유다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이유를 그들의 거짓말에 침묵으로 동조한 죄책감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타마르가 유다의 죄책감을 떨쳐내고 변화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벤야민이 요셉의 종이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가 나서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게 됩니다(창세 44). 형제를 희생시켰던 유다가 형제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타마르를 만나기 전과 후의 유다는 분명 변한 모습을 보입니다. 타마르는 에나임에서 유다를 만나 관계하여 쌍둥이를 낳았는데, 에나임의 뜻이 쌍둥이입니다. 그런데 에나임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눈을 뜨다. 타마르 덕분에 유다는 눈을 떠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유다는 타마르가 자신보다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유다가 타마르에게 한 행위는 불의합니다. 자식들의 악은 보지 못하고, 모든 책임을 며느리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막내아들 셀라가 있기에 타마르는 과부가 아닌데도 과부처럼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당시 친정에 돌아가는 것을 결정할 권리는 시아버지가 아니라 과부에게 있었는데도 말이죠.
타마르가 아니었다면 메시아가 탄생해야 할 유다 가문의 대가 끊어질 뻔했습니다. ‘형사취수제’의 율법에 묶여 셀라는 다른 여인과 혼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타마르의 행위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타마르는 당연히 자살을 목적으로 유다와 관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마르는 율법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이방 문화에서는 ‘형사취수제’의 범위를 훨씬 넓게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시리아 법과 히타이트 법은 죽은 남편의 형제가 없을 때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아들을 낳아줄 수 있게 규정했습니다. 이방 문화에 익숙했던 가나안 여인 타마르는 ‘형사취수제’를 융통성 있게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형제는 되고 시아버지는 안 된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그렇게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2023년 12월 24일(나해) 대림 제4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타마르 (5)
타마르의 행위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율법에 대한 믿음으로 보입니다. 타마르는 유다의 아이를 가진 뒤 형사취수제 율법 준수를 요구하면, 그가 거부하지 못할 것으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 율법을 믿었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타마르는 자신을 구했을 뿐 아니라 유다의 가문을 구하고,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했습니다.
끝으로, 이 이야기에 정체 모를 인물이 등장합니다. 누군가 타마르에게 유다의 동선을 알려주고, 유다에게 타마르의 임신 사실을 알립니다. 이 이야기에서 결정적인 두 사건이 발생하게 만든 이는 누구일까요?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타마르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타마르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이었음에도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이 같은 여인이 우리 한국천주교회에도 있습니다. 복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때 겁이 난 남편이 강 골롬바를 내쫓습니다.
하지만 강 골롬바는 소박데기의 처량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179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를 도와 왕성하게 활동합니다.
그리고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남자 교우들도 주 야고보 신부를 모시는 것을 두려워할 때, 강 골롬바는 그를 자기 집에 숨겨 주었을 뿐 아니라, 대담하게도 포졸들이 들끓는 한양 한복판에 모시고 나가 사목활동을 돕습니다.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롬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포도청에 잡혀가면서도 강 골롬바는 주 야고보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옥에 갇혀서도 강 골롬바는 신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교우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강 골롬바가 한 일을 보면 이스라엘 못지않게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에 살던 여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인데요.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2023년 12월 31일(나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 그동안 <성경 인물 이야기>를 연재해 주신 함원식 이사야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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