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우리 가톨릭에서 예수님의 의미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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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9-02-12 | 조회수3,953 | 추천수0 | 신고 |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왜 보내셨나요?
저는 아직 복음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청년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왜 보내셨나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죄를 사하기 위해? 하느님을 알리기 위해? 새계약을 알려주어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심의 의미도 궁금합니다.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야훼를 찾아라. 만나 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공동번역 이사 55,6)
형제님께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막상 답변을 작성하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형제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왜 보내셨는지'에 대해서 쉽게 설명을 드릴 수 있을까에 대해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네요. 어쩌면 알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느 부분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왜 이 세상에 보냈는지를 이해하시려면 먼저 구약성경의 내용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용이 좀 길더라고 창세기부터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내용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이라는 아주 작은 민족을 선택하셨을까? 이런 궁금증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히려 아브라함은 어쩌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가 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어떤 묵상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고 만나기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어려운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쉽게 이해하려면 로마서를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닫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로마 1,19-23)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사실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시대에는 신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고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저 어렸을 때만 해도 할머니가 가을에 햅쌀로 팥시루떡을 해서 고사를 지내고는 집안 구석구석 그 떡을 접시에 담아서 가져다 놓았었습니다. 부엌엔 조왕신이 있고 하다못해 헛간과 장독대, 소 외양간을 비롯해 여기저기 존재하는 신들에게 그 떡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들이 그 떡을 드시고 당신의 집과 가족들을 보살펴 달라는 그런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 가까이에 몇백 년 된 도토리나무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을 그 도토리 나무를 섬겼었습니다.
요즘 현대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는데 고대 사람들은 어땠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에는 요즘보다 더 신들의 종류도 많았고, 특히나 자기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신의 아버지의 집 수호신을 훔쳐가지고 나오는 장면(창세 31,34)을 보면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이 신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제 추측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생각엔 그것들을 만드신 신이 분명히 계실 거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신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 해와 달, 강, 나무,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어떤 신상들이 절대로 신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고 그것들을 만드신 신이 계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으며 그 신을 꼭 만나고 싶다는 열망, 간절함이 아브라함의 마음에 늘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하느님이신 줄로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었다고 저는 그동안 묵상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하느님을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세상이 당신을 알아보길 원하셨습니다. 로마서 내용을 잘 읽어보시면 하느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에 하느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신이라고 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 이것들은 신이 아니야, 이것들을 만드신 신이 분명 계실거야. 난 그 신을 만나고 싶다." 뭐 이런 열망이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아브라함을 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창세기 12장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고 (중략)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한 민족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한 번 답변을 드렸던 내용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수호신이었던 야훼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었을 때라는 부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성경을 집대성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구약성경이라는 책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책처럼 보여질 수도 있으나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책만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온 세상에 당신의 복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이미 약속하셨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곧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온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세상의 모든 종족들에게 당신의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21장 33절 이하에 나오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 그동안 어떻게 이스라엘을 돌보아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어떻게 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시나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받으면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 계약이 돌판에 새겨진 옛 계약, 곧 구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 계약에 충실하게 살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어떤 때는 판관들을 세워 주셨고, 어떤 때는 왕들을, 또 어떤 때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이 뻣뻣한 백성,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후 인간이 아무리 죄을 저질러도 물로는 노아 때처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무튼 인간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보시면 구원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늘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 구원자를 고대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요.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 내용 그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외치셨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너무도 좋은 이 세상에 우리들을 소풍 보냈는데, 천상병 시인의 노래처럼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만 하느님의 사랑을 잊은 것입니다. 길을 잃은 것이지요. 고향을 잃은 것이고요. 그래서 어둠 속에서 이 세상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삶이 바로 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행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서 그 죄에서 구해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셔야 했는가? 이게 또 어려운 이해입니다. 이 부분은 히브리서를 통해서 설명이 가능한데 오늘은 내용이 너무 길어서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히브리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에 대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신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은 이스라엘 한 민족만의 역사책이 아니고 온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라고 이해하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민족을 선택하셔서 어떻게 그들을 이끌어 주시고 사랑해 주셨는지에 대한 역사, 곧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렀듯이 오늘도 새 아브라함인 우리를, 나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온 인류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라고 이해하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의미에 대해서는 내일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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