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침략과 정복이 아닌 구원을 위한 파견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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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9-03-07 | 조회수3,103 | 추천수0 | 신고 |
참 좋은 묵상거리 주심에 고맙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분만큼 겁나는 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이란 그 이름조차 부르기가 감히 두려워 ‘아도나이’라 불렀답니다. 사실 하느님은 아주 엄하시고 냉엄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기억해 봅시다. 자기 창조물이 온갖 죄에 물들었다고 노아의 가족 8명과 물고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명체를 깡그리 수장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고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의 정복과 분배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정복의 과정에 우리 하느님은 ‘완전 봉헌물’을 요구하셨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요구였습니다. 어쩜 이는 무참히 짓밟는 살육의 침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평화의 구축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의 가나안 지역의 이민족들은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를 믿었고 이런 민족과의 결합에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평화의 구축이 아니라, 죄의 범람으로 평화가 깨어지는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완전 봉헌물은 다른 신들을 용납하지 않는 하느님의 준엄한 요구였습니다. 이것은 ‘침략과 정복’이 아닌, ‘구원을 위한 파견’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신앙인입니다. 이리하여 죄 지을 기회가 줄어들고 지은 죄에 대해서도 회개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이렇게 평화가 주위에 퍼집니다. 구약의 이런 완전 봉헌물이라는 준엄한 제도보다 신약의 예수님 외침은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겁니다. 예수님은 분열을 일으키고자 칼을 주러 오셨답니다.(마태 10,34-36; 루카 12,49-53 참조) 결론적으로 신앙은 냉철한 자기희생입니다. 이를 통해 죄를 멀리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고 기쁜 소식이 퍼지는 평화 공존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를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하느님을 믿는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거듭 이 사순의 시기에 좋은 묵상거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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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기,완전봉헌물,유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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