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루가복음내용해설부탁합니다.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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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9-03-13 | 조회수4,004 | 추천수0 | 신고 |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0-12)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먼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이해하셔야 12절 말씀의 궁금증이 이해가 가능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주석 성경의 각주를 발췌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10절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 1-2에서 묘사된 장면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35절도 참조),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하고만 나누신 대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0절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3,34 참조)은 열두 사도만이 아니다(7,17 ; 9,28;10,10 ; 13,3 참조). 이들은 군중이나 "바깥 사람들"(11절)과는 구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미리 나타낸다.
10절 "비유들" ; "비유"가 복수로 쓰인 것은, 마르코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만이 아니라, 3,23 이하에 나오는 비유들도 염두에 두었을 수가 있음을 뜻한다.
11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 11-1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코에 따르면, 13-20절에서 설명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것 전체에 해당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비' 또는 '비밀'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만이 계시하실 수 있다. 이는 곧 하느님의 계획과 그분 나라의 결정적 도래에 관한 비밀이다(다니 2,18-19.22.27-30 ; 로마 16,25-27 ; 에페 1,9 ; 3,9; 6,19 등 참조).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당신 둘레에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3,23 각주 참조).
3,23 각주 ; "비유라는 말이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마르코에게 비유는, "바깥 사람들"(4,11)에게 감추어진 신비, 곧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킨다(4,11 각주 ; 7,17 각주 참조).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인 것은, 단순히 표상이 풍부해서가 아니다. 이해력을 갖춘 이들에게, 사탄의 종말을 앞당김으로써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활동하기 시작하였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2절 ; 이 인용구는 이사 6,9-10을, 예수님 당시에 쓰이던 구약 성경의 아람 말 번역본인 타르쿰에서 그리스 말로 옮긴 것이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예언자의 설교가 실패하리라는 사실을 예고한다. 백성은 고집스럽게 예언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음으로서, 그 죄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유다인들 사이에서 실패한 사실과 관련하여 이 본문을 사용한다.
유다인들의 완고함이 이미 예언자들에게서 예고되었고, 하느님의 계획 안에 포함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요한 12,39-41 ; 사도 28,26-28). 예수님께서도 이 같은 완고함에 부딪쳐 실패를 체험하셔야만 했다. 그러나 예언서의 구절이 여기에서 인용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메시지를 감추시고 "바깥 사람들"의 회개를 원하지 않으셨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실패가 성경이나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과 일치한다는 점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의 최종적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로마 11,7-16.29-32 참조).
그렇다고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생각이 인간의 책임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24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두 전제 아래 당신의 실패를 이해하셨을 것이다. 마르코는 이러한 숙고를,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된 상황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교들의 이해하기 어려워진 비유들에 적용한다. 비유들은 그것들이 전제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따라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서 먼저 제자들에게, 그다음에는 교회 공동체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 출처 : 주석성경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 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사 6,9-10)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직역 : "…… 마음을 기름기게 하고." 마음 곧 심장에 기름기가 너무 끼어 둔해지고 결국 움직임을 멈춘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반항적이며(1,2-5.19-20 ; 3,8 ; 9,8-9 ; 30,1)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특히 30,9-11 참조) 청중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한다. 예언자의 선포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한 것은 이 때문이며(29,9-12), 예언자는 아하즈 임금의 일에서도 이러한 경험을 분명히 하게 된다(7,2.12-13 ; 8,6.14-15). 이런 소명을 받은 것은 이사야만이 아니다(예레 1,10 ; 에제 2,3-10 ; 3,4 등 참조).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다시 치유되는 ……."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이 경우 '다시 치유됨'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반면에 '돌아옴' 곧 회개는 듣고 보고 깨달음의 정상적인 결과이다. 6,9-10은 신약 성경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마태 13,13-15 ; 마르 4,12 ; 루카 8,9 ; 요한 12,40 ; 사도 28,25-27 참조) * 출처 : 주석성경 이사야 2114쪽 각주 이사 6,9-10의 말씀은 반어법으로 말씀하신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 6장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인데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하시자 이사야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용감하게 손을 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9절에서 10절의 말씀을 이사야에게 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자신이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충실히 잘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나서는 모습을 보시고는 주님께서 반어법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 백성의 마음은 무디고 그 귀는 어둡고 그 눈을 들어 붙어서 그들은 내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해도 마치 내가 받아주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완고한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예언자에게 그 백성이 그런 백성인 줄로 알고 가라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런 이해로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이사 6,9-10절의 말씀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배척하는 "바깥 사람들"의 마음이 곧 이사야 예언자 시대의 그 백성의 마음과 같아서 정말이지 하느님께서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지 못하도록 정해놓으신 것처럼 그만큼 바깥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다는 표현을 반어법으로 표현하셨다고 이해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깥 사람들"의 마음은 꼭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켜 놓으신 것처럼 그만큼 마음이 아주완고한 상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반어법으로 표현하신 것이라고 이해 가능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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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6,9-10, 보고 또 보아도, 바깥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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